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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수발, 가족만 책임지는 건 한계” 日 2000년부터 사회보험 안전망

입력
2018.07.06 04:40
수정
2018.07.06 16:4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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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비슷

일본에서 과거엔 며느리가

시부모 간병 도맡아 큰 부담

여성들이 보험 도입 앞장서기도

지난달 6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의 WABAS 사무실에서 만난 히구치 게이코(왼쪽) 이사장과 활동가들. 1982년 창립부터 37년째 이전 없이 함께한 사무실에는 서류와 책자가 천장까지 쌓여있다.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달 6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의 WABAS 사무실에서 만난 히구치 게이코(왼쪽) 이사장과 활동가들. 1982년 창립부터 37년째 이전 없이 함께한 사무실에는 서류와 책자가 천장까지 쌓여있다. 박소영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평균 수명의 연장은 항상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충분한 준비 없이 맞이하는 평균 수명의 연장은 노인을 돌봐야 하는 가족의 삶을 좀먹고, 떠밀린 노인은 방 구석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바로 가족이 책임지는 노인 수발(일본에서는 노인 수발을 ‘개호(介護)’라고 부른다)의 그늘도 일찍 마주했다. 길고 긴 노인수발에 지친 가족이 노인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심심치 않게 발생하자 2000년 4월부터 일본은 ‘개호의 사회화’를 목표로 의료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에 이어 다섯 번째 사회보험인 개호보험을 시행했다. 개호보험의 목적은 노인의 여생 동안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도록 함과 동시에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한국에서 2008년 7월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비슷한 제도다. ‘행복한 실버’가 이뤄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하다.

일본에 개호보험이 적용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노인수발을 가정 내 여성들이 전담케 하는 일본의 전통적 가족 제도와 가부장적인 사회 인식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에 반발한 여성들, 특히 며느리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들이 주축이 된 ‘고령사회를 좋게 만드는 여성 모임(WABAS∙ THE WOMEN’S ASSOCIATION FOR A BETTER AGING SOCIETY)’은 1982년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37년째 일본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노인 문제 관련 비영리단체다. WABAS를 창립부터 이끈 히구치 게이코(樋口惠子ㆍ85)이사장은 ‘개호보험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지난달 6일, 일본 도쿄의 최대 번화가 신주쿠(新宿)의 한 골목에 자리잡은 WABAS 사무실에서 히구치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8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활발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3시간 가까이 일본의 노인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WABAS의 시작은 고령화가 막 시작되던 1970년대 말 일본의 사회상과 연결돼 있었다. 개호에 대한 정부차원의 시스템 없이 일본 역시 한국의 호주제 등 가부장적 제도와 닮은 ‘이에세이도(家制度)’에 근거해 며느리가 시부모의 간병을 도맡던 시기였다. 히구치 이사장은 “고령화 이슈는 다름 아닌 여성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라며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보통 5년 정도 길고, 고령자 중 여성이 대다수일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도 90%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자 사는 여성의 빈곤도 문제였다. 혼자 사는 노인의 대다수가 여성인데, 당시 남편이 사망하면 부인은 재산의 3분의 1정도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먼저 사망하면 여성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당시는 유엔에서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선포하고 여성차별철폐조약이 마련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여성 문제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컸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여성의 실태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이었다. 히구치 이사장은 “1978년 나온 정부 백서에서도 고령자와 동거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라 보고 고령자 동거비를 따로 예산에 편성하지 않기로 했다”며 “여성에게 노인 간호를 떠넘긴 셈”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소극적인 개호 지원에 분노한 여성들은 1981년 ‘가난한 여성의 노후’를 주제로 첫 심포지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히구치 이사장은 “100명 정도 오리라 예상한 심포지엄에는 500여명이 몰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앉아 들을 정도였다. 대부분 30~50대 사이 시부모를 간호해야 했던 며느리들”이라며 “강연자들은 학자도 있고 여성운동가들도 있었지만 다들 마음이 뜨거워져 열정적으로 현실의 분노를 쏟아내던 자리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며느리’들은 이듬해 창립된 WABAS의 초기 회원이 됐다. WABAS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놓고 다른 장소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해 왔으며 올해 여름 열리는 심포지엄이 어느새 37회째를 맞는다. 수십년의 활동이 쌓이며 WABAS는 일본의 개호보험 탄생의 큰 원동력이 됐다.

히구치 이사장은 개호보험으로 일본의 평범한 생활 풍경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노인들은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집으로 헬퍼가 찾아오고 고령자 시설 차량이 돌아다니면서 노인들이 밖으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개호보험제도 이전엔 가족이 아닌 사람이 노인을 돌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사회의 분위기도 크게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남성의 개호 참여율도 높아졌다. 히구치 이사장은 “개호보험제도가 시작됐을 때에는 개호를 담당하는 남성은 17%뿐이었지만 최근 통계에서 35%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박구원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박구원기자

올해로 개호보험이 시행된 지 18년째. 가구당 자녀수가 감소하고 자녀와 같이 살지 않는 가정이 느는 등 가족구성이 급변하면서 개호보험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일본 기업들의 고민 중 하나가 바로 ‘개호이직(介護離職)’이다. 40~50대 기업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직장을 떠나는 문제가 심각해 정부와 기업들이 ‘개호이직 0% 운동’을 벌일 정도다.

히구치 이사장은 “개호보험 초창기 때에는 건강한 개호자가 집에 있고, 개호자의 부담을 가볍게 하자는 게 제도의 골격이었다면 지금은 ‘노노(老老) 개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녀와 부모 모두 고령자이거나 서로 돌봐야 하는 부부가 고령자인 경우가 많아 더 이상 초창기의 기준이 맞지 않게 됐다”며 “여기에 최근에는 부부만 사는 가정에서 부부가 모두 치매에 걸려 치매에 걸린 노인이 또다른 치매 노인을 돌보는 ‘인인(認認) 개호’도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덧 WABAS 회원의 평균연령이 6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노인 현안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노인들이 복용하는 의약품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다. 히구치 이사장은 “노인들이 평균적으로 10개 이상의 약을 복용 중인데, WABAS에서 전국 5,000여명에 대한 설문 형태의 실태조사를 해 정부 위원회에 참고자료로 제출했다”라며 “개인 회원들은 나이가 들어 하나둘 사망하면서 숫자가 줄고 있지만 전국 지역의 그룹 회원망은 여전히 튼튼하다”고 말했다.

도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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