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면,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내가 오늘 마쳐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이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고 정의할 것이다. 어제와 내일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허상이다. 인생은 오늘의 반복이다. “나는 오늘 하려는 그 일을 내가 선택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시켜 마지못해 하는 일인가? 그 일이 나에게 훌륭할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게도 훌륭한가? 아니면 그 일이 나에게 수치스러운 일인가? 내가 그 일을 완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수년 전 아침 일찍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새로운 일과(日課)에 넣었다. 이것은 샤워나 아침식사 전에 내가 완수해야 할 의무이며 종교다. 공부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에, 나는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먼저 주위를 정비한다. 독서를 즐기고 글에 몰입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공부방과 책상에 널브러진 책들과 학용품들을 정리하고, 집안 바닥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다. 나는 먼저 책상 위 널브러진 책들을 원래 있어야 할 책장으로 돌려보낸다. 볼펜, 만년필, 안경, 그리고 독서대도 자신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꼽아 놓는다. 고대 수메르인들은 신전건축을 수메르어로 ‘키비에(ki.bi.e)’로 표현하였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의미다.
책상과 공부방을 정리한 후, 또 다른 임무가 기다린다. 나는 물걸레 청소포를 밀대에 반듯하게 끼워놓고 바닥을 꼼꼼히 닦는다. 하는 김에 집안 전체를 이런 식으로 청소한다. 나는 하루라는 세월의 흔적을 바닥에 쌓인 먼지로 확인한다. 먼지는 내 눈을 속일 수 있어도, 청소포를 속일 수는 없다. 청소는 겉으로만 근사하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이물질을 제거하는 행위다. 창조적인 하루는 알게 모르게 쌓은 먼지와 같은 잡념들을 제거해야 발동이 걸린다. 창조는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을 제거하려는 과정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창조하다’라는 히브리 단어 ‘바라(bara)’의 원래 의미는 ‘쓸데없는 것을 단절하다’란 의미다. 고대 유대인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희생양을 가장 좋은 부분을 도축하는 행위가 ‘바라’다. 신의 첫 번째 행동이다. ‘정리’와 ‘청소’는 나의 하루를 여는 창조적인 의례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완수해야 할 일’이란 의미를 지닌 ‘의무’란 단어는 억압적이고 타동적인 인상을 품었다. 그러나 ‘의무’의 원래 뜻을 담고 있는 한자 義務(‘의무’)를 보면 이 단어가 숨기고 있는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글자인 ‘옳을 의(義)는 고대 중국에서 신에게 제사에 드리는 희생제물인 ‘양(羊)’과 ‘나’를 뜻하는 ‘아(我)’로 구성되었다. 옮음은 자기 확신에 근거하여 스스로 희생양이 되려는 결심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手)에 창(戈)을 드는 자신으로부터 쓸데없는 것을 자르는 행위다. 누군가의 종용을 받거나 강요된 일은 의무가 아니다. 그런 일엔 신명이 없다. 강요의 결과는 구태의연함과 진부다. 한자 ‘힘쓸 무(務)’는 창(矛)을 들고 힘껏(力) 내리치는(攵)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의무’는 자신에 세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기꺼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룩한 행위다. 여느 사람에게 의무가 부재한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희생양이 될 만큼 자신에게 숭고한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등장하기 시작한 혼란스런 시절에 살았던 정치가이며 사상가가 있다. 키케로 (기원전 106~43년)다. 그의 사상은 후에 등장하는 서양문명, 특히 국가의 개념과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제 62세로 인생의 마지막을 감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4년 10월에서 11월까지 4주 만에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의무에 관하여(De Officiis)’라는 에세이를 썼다. 이 글은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형식이다. 이 책은 다른 작품보다 일화가 많고 스스럼없는 형식으로 자유롭게 기술되었다. 키케로는 그 다음에 죽을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처럼,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이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덕적 의무가 무엇인지 기술하였다. 키케로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의무’란 의미로 ‘오피치움(officium)’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오피치움’은 인간이 자신에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고유한 임무를 의미한다. 키케로는 아들에게 어떤 일을 수행하기 전에, 다음 세 가지를 숙고하라고 아들에게 충고한다. 첫째, 그 일이 명예스러운가? 둘째, 그 일이 유익한가? 셋째, 명예와 유익이 상충할 경우,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것인가? 키케로는 말한다.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 삶의 명예이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수치다.” 오늘 내가 완수해야 할 임무는 무엇인가?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여 그 일을 경건하게 여기는가? 나는 그 의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스스로 희생양이 될 수 있는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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