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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태원의 평행우주

입력
2018.07.0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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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사방을 둘러보며 잠시 머뭇거린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물론 내가 타고 온 열차 안에도, 승강장에 내렸을 때도,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서울 중심가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거리가 유난히 더 북적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나이나 국적 그리고 외모나 옷차림이 서로 너무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딱히 주류라고 할 만한 흐름이 없다. 어쩌면 대로변이나 이면도로에 줄지어 늘어선 가게들, 가게 밖 인도까지 진출한 매대 위에 쌓인 물건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유리벽 너머 마네킹들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들여다본다. 잠자리 날개 같은 천에 밤하늘의 별들을 뭉텅뭉텅 흩뿌려 놓은 듯한 옷들. 어렸을 때 TV에 나오는 여가수들이 입고 있던 옷들. 그 시절에는 언젠가 나도 한 번 입고 싶다고 생각했던 옷들.

이태원에서는 물건을 사는 법도 좀 다르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나온 이야기다. 별로 살 게 없는 나도 쇼핑하러 가는 친구들 뒤를 따른다. 대로변과 이면도로를 연결하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골목 어딘가에 홀연 입구가 나타나고, 입구를 통과해서 계단을 내려가니 사방 벽에 온통 가방들이 걸려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가게 한 구석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밀스런 장소가 나온다. 손님이 취향을 말하면 주인이 물건들을 꺼내 보여준다. 흔히 명품이라 불리는 것의 디자인을 베꼈으나 정교하게 잘 만든 물건들이다. 가능한 한 아무것도 사지 않는 게 삶의 목표인 나도 어깨 너머로 구경하고 있다 보니 슬그머니 욕심이 동할 지경이다.

또 다른 한 무리의 손님들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다. 좁은 공간에 구경꾼이 서 있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먼저 밖으로 나온다. 골목마다 빼곡하게 들어선 가게들을 구경한다. 원피스와 블라우스들, 요즘 유행하는 얇고 치렁치렁한 겉옷들, 그리고 운동화, 샌들, 구두. 바다거품 같은 푸른색 로퍼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너무 뾰족하지도 너무 무난하지도 않은 구두코의 날렵한 곡선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물건은 누가 만들었을까.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예상보다 너무 헐한 값이다. 30만 원짜리 구두 한 켤레를 만들면 6500원에서 7000원을 받았다는 제화공들 사연이 떠오른다. 백화점에 들어가지 못한 저 신발을 만든 사람은 얼마를 받았을까. 그 때 가게 문을 열고 주인이 밖을 내다본다. 내가 진열장 앞에 너무 오래 서 있었나.

친구들과 헤어져 다시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이태원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문득 여기가 아닌 다른 차원의 시공간, 평행우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시작점은 같았으나 어느 시점에서 다른 가능성으로 갈라져 나간 세계, 결코 만날 수 없어서 평행하다고 부르는 세상. 혹시라도 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계들을 발명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누가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많이 빼앗느냐의 경주가 시작되지 않은 시공간이 어느 우주엔가는 있지 않을까? 그 세상에 살고 있을 또 다른 나는 지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아니다. 사람도 물건도 너무 많아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헐하게 대하는 세상이 아니라면, 나는 아름답고 쓸모 있는 물건을 직접 손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만든 물건을 누군가가 평생 닦고 고치고 쓰다듬으면서 소중하게 다뤄줬으면 좋겠다. 무한한 우주 한 구석에 정말로 그런 세상이 존재하리라는 즐거운 믿음을 품고, 나는 지하철 승강장을 향해 내려간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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