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명의 영웅들과 1명의 얼간이’ ‘아르헨티나의 영혼을 가진 잉글랜드인’
평소 극성스럽기로 유명한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으로부터 이처럼 ‘역적’ 취급을 받았던 선수는 다름 아닌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16강에서 베컴은 아르헨티나 디에고 시메오네를 걷어차 퇴장 당했고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영국 언론과 팬들은 베컴을 집중적으로 ‘희생양’ 삼았다. 당시 영국의 인기 주간지 ‘타임아웃’은 베컴에게 광적인 분노와 증오를 쏟아내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베컴은 축구선수 가운데 가장 잘생겼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고, 스파이스 걸스의 빅토리아 애덤스와 사귄다(결혼 전).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다 교수형감이다.”
#2
프로투갈의 ‘축구영웅’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2006년 독일월드컵 잉글랜드와 8강전 후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날 경기에서 잉글랜드 웨인 루니는 경기 중 포르투갈 히카르두 카르발류가 쓰러진 틈을 타 급소 부위를 모른 척 밟고 지나갔다. 양 팀 선수들이 엉겨 붙었고 호날두가 가장 먼저 달려와 주심에게 따졌다. 당시 호날두와 루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료였다. 루니는 결국 퇴장 당했는데 호날두가 포르투갈 벤치를 향해 윙크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마치 ‘임무 완료’라고 말하는 듯했다. 호날두는 벤치의 감독에게 자신이 어느 위치로 가야 하는지 이해했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지만 포르투갈에 승부차기 끝에 무릎 꿇은 잉글랜드 언론들은 앙심을 품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더 선은 다트 보드 위에 호날두의 머리를 그렸다. 윙크를 하는 그의 눈의 다트 표적이었고 기사 제목은 ‘호날두의 눈에 던지세요’였다.
“잉글랜드 팬들이 세계에서 가장 윙크를 잘하는 사람에게 복수할 기회를 드립니다. (중략) 자, 이제 다트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저 괘씸한 자의 눈을 향해 다트를 던져주세요.”
#3
1960년 이후 TV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스포츠이벤트는 온 국민이 함께 치르는 국가적 의식이 됐다. 특히 단일종목 세계선수권으로는 가장 큰 인기와 규모를 자랑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의 근간은 ‘내셔널리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경기에 지거나 부진한 뒤 한 사람을 ‘마녀사냥’ 하는 행위가 종종 자행된다.
러시아월드컵에 참가 중인 한국대표팀의 수비수 장현수(27ㆍFC도쿄)가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가 멕시코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건 맞다.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비난은 지나치다 못해 악질적이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말들이 떠다닌다.
27일 오후 11시(한국시간) 독일과 최종전을 앞둔 신태용 감독도 고민에 빠졌다. ‘주장’ 기성용(29ㆍ스완지시티)이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으니 ‘부주장’인 장현수가 완장을 이어받는 게 자연스럽다. 기량적으로도 장현수는 빼놓을 수 없는 수비수다. 그러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가 온전한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 지가 걱정스럽다. 때문에 장현수가 4-1-4-1 포메이션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중앙 수비라인과 중원을 오가는 전술이 거론된다. 대표팀에 꼭 필요한 장현수를 활용하면서 그의 부담도 덜어주는 포석이 될 수 있다.
#1-1
베컴은 2001년 6월 한일월드컵 유럽예선 그리스와 마지막 경기에서 1-2로 끌려가던 후반 추가시간 40여 미터 지점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터뜨렸다. 잉글랜드가 지면 조 2위로 지옥의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온 극적인 동점골이었다. 모든 잉글랜드 언론과 팬이 베컴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베컴은 2002년 한일,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주장으로 ‘삼사자군단(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애칭)’을 이끌었다.
#1-2
호날두는 잉글랜드 팬들의 위협에 맨유를 떠나려고 했다. 그를 붙잡은 건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수년 전 베컴의 사태를 잘 수습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호날두가 머물고 있는 포르투갈의 알가르베를 직접 찾아 “잉글랜드 팬들은 물어뜯지 못하고 짖어대기만 할 뿐이다” “관중석에서 야유를 보내겠지만 그 이상의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호날두는 마음을 바꿔 영국으로 돌아왔다.
2006년 8월 23일. 맨유가 찰턴 원정을 치렀다. 호날두가 경기장에 들어서자 일제히 욕설과 휘파람,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나 전반 종료 직전 호날두가 개인기로 한 명을 제치고 때린 슈팅이 크로스바에 맞자 관중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을 호날두가 끝장내버릴 가능성에 찰턴 팬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루카 카이올리의 ‘호날두, 완벽을 향한 열정’ 중)
#3-1
장현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직업이 주장’이라고 한다.
2011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 때 완장을 찼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도 주장으로 금메달 획득에 공을 세웠다. 2016년 리우올림픽 때도 ‘캡틴’이었다. 그만큼 안팎으로 솔선수범하고 리더십을 지닌 선수다.
그는 외모가 강인해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아주 ‘강심장’이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일본과 8강전. 0-0 상황에서 종료 2분을 남기고 페널티킥 키커로 나선 장현수는 극도로 긴장된 상황에서 정확하게 골문 오른쪽 상단을 꿰뚫었다. 골키퍼가 알아도 못 막는 코스지만 볼이 공중에 떠 실축하기도 쉬운 위치인데 가볍게 차 넣었다. 태국과 4강전에서 한국은 또 페널티킥을 얻었고 장현수가 키커로 나섰다. 일본전 때와 비슷한 장소로 정확하게 넣었지만 주심은 킥 직전 한국의 다른 선수가 페널티 라인을 침범했다며 다시 차라고 했다. 압박이 더 큰 상황에서 태연하게 반대편 구석으로 깔아 차 성공했다. 페널티킥을 차기 전 태국 골키퍼가 다가와 “어디로 찰지 안다”며 신경전까지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키커가 제대로만 차면 골키퍼는 막을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웃음을 지었다.
멕시코전 다음 날 로스토프나도누 공항에서 이영표 KBS 해설위원을 만났다. 이 위원은 장현수 경기력에 대해 누구보다 날카롭게 쓴소리를 했지만 후배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장현수가 당장 1경기(독일전)를 통해 만회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버렸으면 좋겠다. 시간은 많다. 길게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현수가 독일과 최종전에서 헌신적인 플레이로 박수를 받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그가 독일전에 출전을 못 한다거나 혹은 출전해서 기대만큼의 기량을 보이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베컴이 ‘얼간이’로 축구 인생을 끝내지 않았고 호날두는 시련을 이겨내고 맨유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라선 것처럼 아직 기회는 많다.
찰턴 팬들의 야유를 딛고 호날두가 맹활약을 펼치며 3-0으로 이긴 뒤 퍼거슨이 호날두에게 했다는 말을 장현수에게 들려주고 싶다.
“바로 그런 식으로 맞받아치는 거야. 능력을 보여주면 그들은 침묵할거야. 너의 능력을 보여주는데 겁먹지 마. 너에게 배짱이 있다는 걸 보여주라구!”
카잔(러시아)=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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