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번쩍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가 마시는 술은 독자의 은인이다. “나의 모국어는 술국어”라고 말하는 소설가 권여선(53). 술 소설만 7편을 실은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2016)로 주류(酒類) 문학의 정점을 찍은 뒤, 술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금주 문학에 도전 중이다. “다른 걸로 바꿔 먹으면 취기를 측정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보다 맛없는 술이 없지만 소주만 마신다”는 애주가의 욕망은 안주로 풀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부터 환절기까지, 자신에게 안주를 해 먹인 기록을 산문으로 썼다. 아마도 국내 최초의 본격 안주 산문집일 ‘오늘 뭐 먹지?’가 얼마 전 나왔다. 소설가 데뷔 22년만의 첫 산문집이다. 인터뷰하면서 술 이야기는 조금만 해야지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또 술을 썼다.
“약점을 숨기면 구차하니까 상이용사처럼 이거 봐라 한 거다. 나도 좀 식상하긴 한데 어쩔 수 없다. 술이 실핏줄까지 삶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할 정도니까. 대신 요즘 쓰는 소설엔 술이 거의 안 나온다. ‘안녕 주정뱅이’ 이후 처음 쓴 단편에선 원래 주인공이 술을 먹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주인공 옆자리에서 먹는 걸로 바꿔 썼다.”
-술이 글쓰기 혹은 생활을 훼방 놓지 않나.
“‘혼술’을 주로 하면서 소설 속 인물만 생각한다. 맨정신으로는 들기 어려운 생각이 올 때가 있다. 인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괴로움을 덜어주기도 한다. 글과 거리를 둘 수 있으니 퇴고할 때도 좋다. 술 세게 먹고 글을 보면 전생에 쓴 것 같다. 나를 파괴할 정도로 술 먹던 때에선 벗어났다. 술과 공존, 동행하고 있다는 게 기쁘다.”
-소설에서 술이 삶의 고통을 가리켰다면, 산문은 재래시장에서 산 제철 재료로 온갖 안주를 만들어 먹는 신나는 이야기다(서울 사당동 태평백화점 뒤쪽 ‘남성시장’이 권 작가가 누비는 무대다).
“소설은 삶의 산문성에 관한 것이어서 우울하거나 사나운 이야기가 되기 마련인데, 산문은 다르다. 소설은 그 안에 들어가 쥐어 짜는 글이고, 산문은 즐겁게 노래하는 글이다. 내가 글로 쓴 음식을 내가 먹고 싶은 적도 많았다.”
-식재료에 거금 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를 잘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게 소중하다. 삶을 명랑하게 하니까. ‘정신’에는 좋은걸 주려고 하면서 ‘몸’에는 왜 안 그러나. 왜 아무 거나 후딱 먹고 학대하나. 어떤 일을 급하게 하는 건, 그걸 하는 시간을 의미 없는 징검다리로 여겨서다. 그 시간도 결국 내가 사는 시간 아닌가. 나는 그 시간 안 아낀다. 콩나물, 시래기 산처럼 쌓아 놓고 종일 꼼지락꼼지락 다듬곤 한다.”
-소주에 순댓국 혼자 먹다 눈총 받는 이야기, 김밥 통째로 먹는 습관 때문에 집안 여자들에게 흠 잡히는 숙모 이야기, 명절노동 이야기까지, 가부장제를 슬쩍슬쩍 건드린다. 선친이 경북 안동 출신이라 집안이 ‘보수적’이었나.
“서울, 수원에 걸쳐 있는 외가가 훨씬 더 그랬다. 여자 어른들이 숙모를 욕하면서 ‘남자 어른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를 댔다. 여자들이 떠받드는 남자 어른들은 제멋대로 굴었다. 그런 걸 보고 자란 탓에 여성혐오가 내면화된 면도 있다.”
-문단 내 성폭력 문제도 권력 문제 아닌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집안 남자 친척에게 어른들이 그랬듯, 남성 원로∙중견 작가를 떠받드는 문화가 내 뼛속 깊이 있었다. 그 문제는 한 번 갈아 엎어야지, 완만하게는 절대 좋아질 수 없다. 왜 남자들이 실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왜 스킨십에 너그러웠나, 그렇게 스스로 갈아 엎고 나니까 과거 문화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젊은 친구들의 극단적 주장에 수긍하려 하는 편인데, ‘그러려는 편이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싶다. 어떻게든 처절하게 이해하려 한다. 성폭력 문제가 문단에 가한 충격은 세월호 참사에 육박한다.”
-세월호의 충격은 문단에서 어떻게 나타났나.
“문학에서 현실이 과한 지위를 누리다가 역방향으로 내밀해진 시기가 있었다. 문학이 자질구레해졌다는 위기감 때문에 작가들이 어떤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월호가 확 맞아떨어졌다. 세월호 이후 젊은 작가들의 폭발력이 한국 문학의 동력이 될 거다. 한국 문학의 세대교체는 이미 진행 중이다.”
-‘오늘 나는 왜 소설을 쓰나’를 묻는다면.
“예전엔 관성, 지속에의 욕망 때문이라고 답했는데, 오늘은 모르겠다. 답을 지어내고 싶지 않다. 왜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오늘부터 못 쓴다’고 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다. 죽으라는 말처럼 들릴 것 같다.”
-아침엔 뭘 먹었나. 저녁엔 뭘 먹나.
“어제 만들어 둔 호박 나물, 느타리버섯과 양파 볶음, 열무김치에 김 자반을 먹었다. 여름 밑반찬으로 늘 해 두는 장조림은 오늘은 안 먹었다. 저녁엔 술 마실 건데, 안주는 시장 가서 정할 거다. 피조개, 관자가 제철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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