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지구 마을 또 철거 위협
유목민족 정체성 빼앗길 위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에 등장했던 중동의 베두인 부족. 50여년전 영화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랍계 유목민으로 묘사됐던 이 부족이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에 밀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 당국은 이스라엘이 점령 중인 서안 지구 소재 베두인 거주 지역인 칸 알 아마르 마을 철거를 위협하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의 베두인 거주 지역 철거 압박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불도저를 동원해 집과 학교를 부수고, 맨 손으로 저항하던 베두인 주민들과 충돌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추방을 내세우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허가 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건물을 지은 게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이스라엘 법원 역시 이 같은 정부의 입장에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신청해도 이스라엘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더 나은 생활 환경의 개선이다. 칸 알 아마르 마을은 서안 지구에 설치된 유대인 정착촌 두 곳을 잇는 도로 옆길 휑한 언덕들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허름한 판잣집 몇 채만 덩그러니 모여 있을 뿐, 수도나 전기 시설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폐타이어와 진흙을 얼기설기 엮어 지은 게 고작이다.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의 논리가 꽤나 그럴 싸해 보인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베두인들의 거주 지역은 불법일뿐더러 안전하지도 않다”며 “새롭고 현대적인 곳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베두인들에게 이 보금자리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곳이다. 사막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아온 유목민의 정체성을 지닌 베두인들의 생업은 양치기다. 무하마드 아부 칼리(50)씨는 “우리는 베두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과거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된 베두인 마을의 경우, 생업 수단이 전혀 제공되지 않아 빈민촌으로 전락했던 전례도 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살라이 메리도르는 “유대인이 다시 이 땅에 도착했을 때부터 베두인들은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정착지 개발을 방해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스라엘 정부의 몰아붙이기 식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당장 칸 알 아마르 지역에만 92건의 신규 건축 허가를 내주며 법대로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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