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같은 벗들과 군산에 갔다. 근대문화유산을 살뜰히 둘러봤다. 무감(無感)한 듯 우리와 마주한 유산에 군산서 자란 벗의 이야기가 푸근한 온기를 입혀줬다. 도탑게 쌓인 문화두께에 뿌듯해질 즈음, 벗의 부모님께서 베풀어주신 귀한 음식으로 여정에 큰 은혜가 더해졌다.
다음날 근처 문화유산 몇 군데를 마저 본 후 시내서 짐짓 떨어진 발산초등학교로 향했다. 뒤안에는 일제강점기, 이 일대의 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그러모았다는 발산리 석등과 5층 석탑 등의 보물급 문화재가 있었다. 작지 않은 크기의 창고도 있었다. 그러모은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는 창고엔 당시 미국에서 수입한 두터운 철문과 방범용 이중창이 달려 있었다. 한 개인이 자행한 문화재 약탈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또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망한 나라는 점령국의 일개 민간인에게조차 언제라도 뜯어 먹힐 수 있는 먹잇감에 불과했음이다.
여정의 마지막은 임피역이었다. 한때 제법 붐볐다던 임피역, 우리가 찾았을 땐 화사한 햇살에 차분히 안겨 있었다. 전라선 춘포역 다음으로 오래됐다는 역사(驛舍)가 한 마음에 포옥 담겨왔다. 인적 뜸한 역사는 임피역 간이 박물관이었다. 많이 소략했지만 그래도 일제강점기와 깊이 맞물린 임피역 역사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멈춰선 듯 시간여행에 젖을 무렵, “대륙으로 가는 최단경로!”라는 글귀가 성큼 다가섰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제작한 선전물 속 문구였다.
“여행으로 약진하는 조선을 확인하자”는 부제 밑으론 한반도와 만주, 북경 일대가 포함된 지도가 보였다. 부산-북경 간 철로와 양곡 수탈 등 만주 경영에 요긴했던 전라선이 표시돼 있었다. 그 옆의 “부산 북경간 직통 급행 대륙흥아호”란 표현도 눈에 띄었다. 대륙 진출의 첫 관문인 부산과 대륙의 오랜 중심 북경을 잇는 철길이 ‘최단경로-약진-직통-급행’의 수사학적 배치로 한껏 강조돼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렇게 놓인 철로로 제국주의적 욕망만을 연신 실어 날랐다. 그 가능성의 철길은 식민 착취와 자본 증식으로 피폐해진 민초의 지친 숨결로 허덕거렸고 결국은 남북 분단으로 토막 났다.
며칠 전 한국과 러시아 정상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를 잇기 위해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가 실질적으로 진전된다면 남북한과 러시아, 유럽을 잇는 철도망이 구축될 전망이다. 남북한과 만주,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 일대와 유럽을 잇는 철도망도 당연히 복원될 것이다. 한반도 곳곳에서 유라시아 대륙행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이 70여년 만에 다시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열리는 철로에는 무엇이 실려야 할까. 지난 시절처럼 제국주의적 야욕이나 이념 갈등으로 철길이 끊기는 등의 야만이 더는 실려선 안 되기에 하는 말이다. 특정 정권이나 자본가의 속물적 욕망으로 그 가능성의 철길을 재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경제적 이윤 창출은 여러 모로 볼 때 필요하지만, 식민과 냉전의 잔재를 딛고 열리는 평화의 철길에 그것만이 오감은 또 다른 야만이다. 그럼 무엇으로 그 열린 철길을 채워가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야기다. 철로가 시작되고 경유하며 도착하는 곳들과 연관된 갖은 이야기 말이다. 길이 이어지면 인적, 물적 교류와 함께 이야기가 오가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보지 못한 곳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상상하곤 한다. 이역(異域)의 낯선 세계는 그렇게 사람들의 현실생활 속 일부로 들어오게 되고, 이는 다시 이역의 세계와 소통하고 교통할 필요성을 더욱 강화해준다. 그 결과 길의 연결은 자본이나 이념에 쉬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야기가 국가적 차원은 물론 개인 차원에서도 ‘한국-북한-중국/러시아-서역-유럽’의 철도 연결을 일상의 기본으로 착근시켜 준다는 얘기다. 그럼으로써 철길은 지리적 공간을 이어주는 데서 나아가 문화적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인문의 길’, 곧 ‘휴모레일(Humo-rail, Human Railroad)’로 거듭나게 된다. 마침 정보통신기술의 숨 가쁜 진보로 이동 중에도 첨단화된 지능형(Smart) 서비스의 활용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기차가 이동만을 위한 기계적 공간에서 여러 활동이 가능한 인문적 공간으로 전이됐다. 한마디로 ‘기계 철도’의 시대가 저물고 ‘스마트 철도’의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여기에 인문이 더해진 ‘스마트 휴모레일’의 구현은 경제적 차원에서도 사뭇 이롭다. 주지하듯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문 곧 문화와 경제가 결합된 ‘비지니스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개척할 때 이윤의 지속적이고 안정적 창출이 한결 수월해진다. 단타 매매하듯 교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기반으로 교역할 때 한층 가성비 높은 시장 창출과 운영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다시 열리는 유라시아 대륙을 향한 철길이, 물품이 오가는 ‘물류(物流) 철도’이자 문화가 오가는 ‘문류(文流) 철도’여야 하는 까닭의 하나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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