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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정권교체 기여했으나 지역주의 조장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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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정권교체 기여했으나 지역주의 조장은 한계

입력
2018.06.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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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1989년 국회 새의원회관 준공 및 정기총회 폐회 리셉션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좌)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악수하는 동안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웃으며 지켜보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1989년 국회 새의원회관 준공 및 정기총회 폐회 리셉션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좌)와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악수하는 동안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웃으며 지켜보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치 풍운아’로 불려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에 대한 평가는 한국 현대 정치사만큼이나 양면적이다. 김 전 총리가 주도해 맺은 한일협정의 경우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자평에도 불구하고 대일 과거사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킨 굴욕회담이란 비판이 여전하다. 또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DJP연합을 성사시켜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역주의를 조장했다는 한계를 남겼다.

조국 근대화에 기여 VS 제2의 이완용, 한일협정의 명암

김 전 총리는 2013년 9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자신의 정치관을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ㆍ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을 꺼내 들어 설명했다. 그는 “항심이란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마음으로 항산, 즉 경제력이 있어야 민주주의와 자유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며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와 자유가 있느냐.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유하고, 인간답고 여유 있게 살게 될 경지를 목표로 하되 그걸 뒷받침할 경제력을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5ㆍ16 쿠데타를 도모하고 유신정권 창출에 동조한 일련의 정치 행보가 모두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였다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였다. 실제 그는 군사정권 시절 독일 광부 파견과 월남전 파병을 결정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하며 산업화를 일구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총리가 내세운 정치 업적 중 가장 논란을 빚는 것은 1965년 6월 체결한 한일협정이다. 그는 당시 일본 외무장관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비밀접촉을 갖고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일제 강점 하 강제 동원 피해자 및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등 우리 정부의 대일청구권 문제를 8억달러의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단락 짓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김 전 총리는 이후 자민련 총재 시절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제2의 이완용이 될 각오로, 국가적 신념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했다”며 “1960년대 초반 우리는 조국 근대화를 해야 했지만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 시대에는 한일협정의 논리와 당위성이 있는 것”이라고 협정 체결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운정회 창립총회 연설에서도 그는 당시 야당 총재였던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이 자신을 비판했던 일화를 전하며 “나는 매국노가 아닙니다. 나는 이완용이 아닙니다”라고 큰 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과거사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키며 문제 해결의 첫 단추를 잘못 뀄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역사의 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게 학계의 냉정한 평가다.

수평적 정권교체 기여, 지역주의 조장은 오점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DJP 연합도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의 길을 걸어왔던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DJP 연합을 깜짝 성사시켰다. 그 결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성과를 일궜다. 장명수 전 한국일보 사장은 운정회 창립총회 축사에서 “DJ와 JP는 악연으로 얼룩진 숙명적인 정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연합이 가능했을까. 내각제 개헌 약속에 앞서 DJP 연합이야말로 역사의 매듭을 풀고 순리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정치적 결단으로 정권교체라는 대의를 이뤄냈다는 긍정 평가인 셈이다.

그러나 DJP 연합도 결국은 3김 시대의 산물인 지역주의 연합으로 탄생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김 전 총리는 1995년 “충청도가 핫바지냐”는 구호를 앞세워 지역정당인 자민련을 만들며 망국병인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영남은 단결돼 지난 총선 때 단 한 석도 내주지 않았고 호남도 마찬가지였지만, 충청도는 마음이 좋아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나눠 주다 보니 분열됐다. 또 그럴 거냐.”(2002년 대선 출정식) 이처럼 김 전 총리는 지역주의를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발언을 일삼아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도한 낙천 대상자 1순위에 꼽히기도 했다. 이와 함께 김 전 총리가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3당 합당부터 DJP 연합 때까지 일관되게 부르짖었던 내각제 개헌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도 정치적 한계로 거론된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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