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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원한?...그날 밤, 슈퍼마켓에선 무슨 일이

입력
2018.06.24 14:00
수정
2018.06.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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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1995년 7월30일. 일본 최대 명절 ‘오봉(お盆ㆍ8월 15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열도는 잔뜩 들떠 있었다. 도쿄 하치오지(八王子)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강술래’와 같은 전통 민요 ‘탄코우세츠(炭坑節)’ 가락이 시내 곳곳을 휘감았다.

하지만 구수한 곡조가 잦아들기 무섭게 끼어든 불협화음이 있었다. 이날 밤 9시17분 하치오지시 오오마치(大和田)쵸의 한 슈퍼마켓에서 총성 5발이 울려 퍼졌다. 희생된 사람은 총 3명. 슈퍼마켓 여직원 A(47)씨와 아르바이트로 계산대 업무를 담당하던 여고생 B(17), C16)양이었다. 모두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고, 시신은 슈퍼마켓 2층 사무실에서 발견됐다.

그날 밤, 슈퍼마켓에서는 무슨 일이

경찰은 목격자 진술을 통해 사건 당일 피해자들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이날 오후 5시, 남성 직원 1명이 퇴근하자 가게엔 A씨 혼자 남았다. 얼마 뒤 학교를 마친 B양이 가게로 출근했다. 인근 고교에 재학중인 B양은 가게와 3분 거리에 있는 집에 살았다. 그 무렵, 가게 바깥은 유달리 시끄러웠다. 슈퍼마켓과 100m 떨어진 공원에서 오봉 맞이 윤무(여럿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돌면서 추는 춤) 대회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날 휴무였던 가게 아르바이트생 C양이었다. B양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C양은 가게에서 B양의 근무가 끝나는 밤 9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A씨는 밤 8시쯤 계산대를 정리하고 슈퍼마켓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윤무 대회 때문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밤 8시 51분. 어둠이 짙게 깔리자 바깥의 윤무 대회도 절정에 이르렀다.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탄코우세츠’를 부르며 마을 어귀를 돌아다녔다. B양은 가게 문을 닫으며 달걀과 우유를 샀다. 밤 9시 17분. 정체불명의 총성이 가게 안에서 울려 퍼졌다. 진원지는 2층 사무실. 이날 저녁 약속이 있던 A씨가 친구 D씨에게 전화해 ‘나를 데리러 오라’고 말한 지 2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총성은 4번 더 이어졌다. 얼마 안 가 전화를 받은 D씨가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A씨가 밖으로 나오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밤 10시. 가게 주인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D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A씨, B양, C양이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강도 살인인가, 원한 살인인가

현장은 살인사건치고 비교적 깔끔했다. 피해자들이 발견된 곳에 피 웅덩이가 져 있었지만 난잡한 정도는 아니었다. A씨는 머리에 총알 두 발을 맞고, 사무실 안쪽 금고에 기대듯 쓰러져 있었다. 두피엔 그을린 흔적이 있었는데, 총에 맞으며 생긴 상처처럼 보였다. 범인은 A씨 머리에 총을 밀착시킨 상태에서 쏜 것으로 추정됐다. B양과 C양은 손과 입이 접착테이프로 묶인 상태에서 머리에 한 발씩 총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세 사람을 죽인 뒤 쐈는지, 죽이기 전 쐈는지 알 수 없으나 안쪽 금고에 탄흔이 남아있었다. 5발 중 4발은 세 사람에게 쏘고, 나머지 1발을 금고에 쏜 건데 문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금고의 돈을 노렸다면 A씨를 협박해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돈 관리를 하는 A씨는 금고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은 금고의 돈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성 3명만 살해한 채 현장을 떠났다. 이들의 지갑도 건드리지 않았다.

경찰은 강도가 아닌 원한 살인을 의심했다. 실제 A씨는 당시 한 남성으로부터 심한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면 당신을 죽이겠다”는 내용과 함께 커터칼 조각이 담긴 편지가 가게로 날아들기도 했다. 유독 A씨 시신의 훼손 정도가 심한 것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한 살해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버 킬(Over Killㆍ과도하게 시신을 훼손하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결코 가벼운 수준도 아니었다.

증거도 많았다. 먼저 B양, C양에게서 떼어낸 접착테이프에서 범인 것으로 보이는 지문이 채취됐다. 수상한 발자국 10여 점이 현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특히 발자국 부착물에서 미세한 철분과 이끼, 점토가 나온 게 고무적이었다. 범인이 철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범행에 사용한 권총은 필리핀제 총으로 추정됐다. 이 총은 성능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범인은 정확히 피해자들을 명중시켰다. 즉 범인은 총기에 익숙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끈질긴 저인망식 수사에도 용의자 특정에는 실패했다.

수사는 현재진행형

2017년 7월30일. 지금은 주차장이 된 오오마치쵸의 옛 슈퍼마켓 터로 정장 차림 경찰 20명이 몰려들었다. 하치오지 경찰서 수사1팀 직원들이었다. 직원들은 희생자들을 향해 꽃을 올리면서 20년 넘게 미제로 남아 있는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우에노 히로아키(上野洋明) 수사1과장은 “범인을 검거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2017년 7월 30일 일본 경시청 홈페이지 캡처
2017년 7월 30일 일본 경시청 홈페이지 캡처

하치오지 총기 살인사건의 수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정부는 범인에게 사형이 선고될 수도 있는 중범죄에는 공소시효(15년)를 두지 않는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2017년까지 하치오지 사건에 투입된 경찰 병력은 약 19만 명.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다. 지금도 약 20명의 경찰이 수사 본부를 꾸려 사건을 수사 중이다. 범인에게 걸린 현상금은 600만 엔(약 6,000만 원) 정도다.

하치오지 사건은 긴 수사 기간만큼, 많은 사람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2001년 한 현지 매체는 자위대 출신 남성이 이번 사건의 진범일지 모른다고 보도해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한일 월드컵 열풍이 한창이던 2002년엔 산케이 신문이 과거 은행강도 전과가 있고,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997년 총기를 이용해 은행을 털려다 미수에 그친 70대 남성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경찰은 두 명 모두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범인 검거에 대한 기대감이 가장 높았던 때는 2015년이었다. 경시청이 그 해 2월 과거 지문 기록을 뒤지다가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과 거의 비슷한 지문을 지닌 남성 E씨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다른 두 사람의 지문이 흡사하게 일치할 확률은 1억 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D씨는 발견 시점으로부터 10년 전인 2005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유력한 용의자의 존재를 확인하고도 추가 조사에 들어갈 수 없었던 허망한 순간이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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