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6ㆍ13 지방선거 지역별 득표율을 국회의원 선거구에 적용하면 자유한국당 의석은 20석 남짓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지만 지방선거 결과가 이렇게 입법권력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쪽엔 횡재를, 다른 쪽엔 쓰나미를 안긴 6ㆍ13 대지진이 12곳의 재보궐선거를 통해 국회권력의 지형을 크게 흔든 것도 사실이다.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의 의석 격차가 15석 이상으로 크게 벌어져 친여권 성향 야당 및 의원과의 '과반 연대' 역시 한층 수월해진 까닭이다.
양적 조건만 좋아진 것은 아니다. 사사건건 발목 잡고 툭하면 드러눕던 야당 지도부는 제풀에 나가 떨어졌다. 각자도생에 급급하며 지도부의 냉전적 독선을 방관하던 오합지졸도 '제얼굴에 침뱉기'를 일삼으며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다. 개혁입법과 개헌 등 현안마다 한국당에 막혀 고전했던 민주당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환경이다. "박근혜 잔재가 남아 있는 과거 입법권력이 문재인 정부의 현재 촛불권력을 물고 늘어져 국정 효율을 떨어뜨린다"며 의원직 총사퇴 및 조기 총선까지 주장해 온 입장에선 탄성을 지를 만하다. 이해찬 의원 등이 그려 온 '20년 진보 집권론'이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이 정부는 뭐가 좀 다르다. 선거 다음 날 문 대통령부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최고의 투표율과 압도적 지지에 대한 감사는 짧았고 "국정 전반을 다 잘했다고 보내 준 지지가 아님을 알기에 결코 자만하거나 안일하지 않도록 경계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그는 최근 청와대 직원들과 공유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선거 승리는 기쁜 일이지만 동시에 그 지지는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의 두려움이 아니라 등에서 식은 땀이 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이라며 유능ㆍ도덕성ㆍ겸손을 3대 지침으로 강조했다.
민주당도 2004년 17대 총선과 2016년 20대 총선 승리 후 자만과 자중지란으로 대세를 망쳤던 사례를 학습하며 "위대한 승리가 비극적 추락의 시발점이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자"는 메시지를 연일 날리고 있다. 민주당이 유능해 얻은 승리라기보다 보수세력의 지리멸렬에 따른 반사이익이 컸던 만큼 책임과 반성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당이 새누리당 시절 '정신차리자, 한 순간 훅 간다'고 벽에 써붙여 놓고도 청와대에 찍히는 것이 두려워 정신 못차린 것과 잘 대비된다.
낮춤 모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지지율이 높다면 함께 한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이 모두 잘했다는 뜻"이라고 이낙연 내각과 임종석 비서실에 강한 신뢰를 표시했다. 리더십ㆍ정책ㆍ소통에서 실패한 보수의 패배가 아니라 평화ㆍ분배ㆍ공정에 매진한 진보의 승리라는 인식이다. 엊그제 열린 고위 당정청회의가 집권 2기의 최대 위험으로 지목된 민생 현안 해결에 정부자원을 총력 투입하는 한편 주요 정책의 완급을 조절키로 한 것은 이런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뭔가 빠졌다. 패자에 대한 배려 말이다. 그로기 상태의 치명상을 입어 모두 수술대에 올라간 야당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처리할 국민투표법 개정이 야당 저지로 무산된 4월 하순 문 대통령은 "비상식이 아무런 고민없이 되풀이되는 우리 정치를 저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분노와 실망을 쏟아 냈다. 비효율의 표상인 '여의도 정치', 특히 야당의 행태를 개탄해 온 만큼 선거를 계기로 여의도 문화를 바꿔 볼 의욕도 가질 법하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떠받들겠다는 집권세력의 결의는 충만하지만 그 결의 이행에 필요한 여의도 환경을 만드는 것에는 무심하니 말이다. 대화 상대가 없어 하반기 국회 원구성이 지연되는 현실만 봐도 함께 손바닥쳐 줄 야당 재건과 재편은 여당에도 중대 관심사다. 일찍이 강준만 교수는 민심의 속성은 변심이라고 했다. 집권세력이 지방선거의 의미를 키우려면 지금 야권에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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