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청와대, 더불어민주당이 20일 종업원 300인 이상 사업장의 주 52시간 근로시간제 시행을 불과 열흘 앞두고 사실상 6개월 유예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예정대로 다음달 1일부터 시행을 하되 계도기간을 6개월 부여해 올 연말까지는 법을 위반하더라도 시정 요구만 할 뿐 사업주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껏 “준비는 충분하다”며 강행 의지를 보였던 정부가 전날 재계 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혼란을 막기 위해 6개월 계도기간을 달라”고 요구한 것을 하룻만에 수용하는 형태로 물러서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박범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20일 국회에서 고위 당정청협의회 뒤 브리핑을 갖고 “근로시간 단축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현장의 제도 연착륙을 위해 당분간 감독ㆍ처벌보다 계도를 중심으로 지도할 필요가 있다”며 “6개월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올 연말까지는 주 52시간을 지키지 않더라도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위반 시 사업주가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2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근로시간의 급격한 단축으로 적잖은 혼란이 우려되고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해소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계도기간을 부여하는 건 불가피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재계는 당정청의 결정에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전날 고용노동부에 계도기간을 늘려달라는 ‘경영계 건의문’을 제출했던 경총 관계자는 “우리의 건의에 정부가 긍정적인 입장을 곧바로 내놓음에 따라 근로시간 단축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도 “근로시간 단축은 근로자에게도 임금 감소 가능성 등 영향이 있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정부가 제도 연착륙을 위해 재계 건의를 수용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4개월 넘는 기간 동안 줄곧 안일하게 대응해오다 갑자기 입장을 급선회한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에 대한 비판은 거세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불과 보름 가량 전인 6일에도 “옛날(2004년)에 주5일제를 시행할 때도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것같이, 기업들이 다 도산한다고 했는데 잘 정착됐다”며 “300인 이상 대기업과 그 계열사까지도 (근로시간 단축에) 충분히 준비가 돼 있다”고 법 시행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왔다. 기업 현장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뒤늦은 가이드라인 제작 등 준비 부족이 결국은 사실상 시행 유예로 이어진 셈이다.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장기 계도기간을 두고도 말들이 나온다. 고용부 측은 이번 결정이 실제로는 ‘계도기간’이 아닌 ‘시정기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행 고용부 근로감독관 집무규정 상 근로감독관은 근로시간 위반 사업장에 최대 7일, 추가 7일 등 최장 14일의 시정기간을 부여할 수 있는데 이를 각각 3개월씩 최장 6개월로 늘려 적용하겠다는 것이어서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에 대해 "(계도기간은) 행정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고민이 있었는데, 모처럼 경총에서 제안해와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사나 재판에서의 재량권까지 동원하겠다는 당정청의 입장 역시 논란거리다. 박 수석대변인은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에 대해) 수사에서 얼마든 재량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며 “검찰에선 기소유예 입건유예, 재판에선 선고유예 같은 여러 정상참작이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새 근로기준법에 따라 이미 고소ㆍ고발 등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까지 ‘선처’하도록 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수사기관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근로시간 단축은 7월부터 시행이지만 휴일 8시간 이내의 휴일 근로에 대해서는 통상임금의 50%를, 초과 분에 대해서는 100%를 가산하는 조항은 법안이 공포된 지난 3월 20일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다.
노동계는 주 52시간 근로시간제가 사실상 유예된 것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가뜩이나 꼬인 노정 관계에 더욱 짙은 먹구름이 끼게 됐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법 시행 전 입법 취지를 무력화해 피해가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현실을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한국노총도 “6개월 봐주기는 최저임금법 개악에 이어 정부ㆍ여당이 또다시 사용자 편들기에 나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ilbo.com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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