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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 척! 그대가 우리동네 어벤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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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 척! 그대가 우리동네 어벤져스

입력
2018.06.23 09:00
수정
2018.06.23 11:25
1면
0 0

#1 의암호 의인 삼총사

의암호에 추락한 차 보자마자

고3 학생 3명이 호수에 뛰어들어

#2 평택 의인 한영탁씨

고속도로 분리대 긁으며 달린 차

고의 추돌로 멈추게 해 사고 막아

#3 충남 의인 손호진씨

사고 후 주택가를 향하던 차

달려가 창문 열고 가까스로 세워

#4 지하철 의인 김지운씨

‘심정지 환자 발생’ 방송 듣고

남성 2명과 심폐소생술 등 시도

“운명처럼 사고 현장에 있었을 뿐

우리는 ‘평범한 이웃’입니다”

열아홉 동갑내기 친구인 최태준, 성준용, 김지수(왼쪽부터)씨는 지난해 11월 강원 춘천 의암호에 빠진 차량에 타고 있던 운전자를 함께 구해 냈고, 세상은 그들을 ‘의암호 의인 삼총사’라 불렀다. 동네 평범한 대학생 같아 보이지만 같은 상황이 오면 더 잘 구할 수 있게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매일 왕복 2시간이 넘는 곳을 가서 장애인들에게 수영을 가르친다는 이들의 가슴은 용기와 희생 정신으로 타오르고 있다.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박상준 기자
열아홉 동갑내기 친구인 최태준, 성준용, 김지수(왼쪽부터)씨는 지난해 11월 강원 춘천 의암호에 빠진 차량에 타고 있던 운전자를 함께 구해 냈고, 세상은 그들을 ‘의암호 의인 삼총사’라 불렀다. 동네 평범한 대학생 같아 보이지만 같은 상황이 오면 더 잘 구할 수 있게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매일 왕복 2시간이 넘는 곳을 가서 장애인들에게 수영을 가르친다는 이들의 가슴은 용기와 희생 정신으로 타오르고 있다.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박상준 기자

대학 1학년 김지수(서울ㆍ한국체대), 성준용(전북ㆍ군장대), 최태준(대구ㆍ대구대) 세 사람은 열아홉 동갑내기 친구 사이다. 강원체고(강원 춘천시 소재)에서 수영과 수구 선수로 활약하다 올해 초 대학에 입학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강원 도민체전 출전을 위해 17일 춘천에 모였다. 기말고사 준비가 걱정이라는 둥, 살쪄 고민이라는 둥 말하는 걸 보면 동네 평범한 대학생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의암호 의인 삼총사’라는 남다른 별칭이 있다. 춘천 의암호에 빠진 승용차 운전자의 생명을 함께 구해낸 뒤 세상이 붙여준 이름이다.

‘쿵’. 지난해 11월 1일 충북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마치고 의암호 옆 송암 스포츠타운에서 회복 훈련 중이던 세 사람은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던 오후 4시께 둔탁한 굉음을 듣고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호수와 가까운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어 소리를 빨리 알아챘어요. 평범한 소리가 아닌 것 같아 무작정 달렸죠.” 김씨와 친구들이 달려간 호숫가에선 이미 물에 빠진 차량의 꽁무니가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언덕에 주차돼 있던 승용차가 움직이려다 미끄러지며 추락했다. 호숫가로 모여든 사람들은 발을 동동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늦가을 강원 산간지역 호수의 수온을 참아내며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물속으로 몸을 던질 용기를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꼼짝없이 운전자는 생명을 잃을 절체절명의 순간. 세 청년은 웃옷을 벗고 물속으로 달렸다. “주변에선 ‘2차 사고가 날 수 있다’며 고함치고 말렸지만 꾸물거릴 겨를이 없었어요.” 성씨가 앞섰고 김씨와 최씨가 뒤를 이었다. 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던져 준 구명조끼를 입을 새도 없이 30m를 헤엄쳤다.

지난해 11월 김지수, 성준용, 최태준 3명이 강원 춘천 의암호에 빠진 차량 운전자를 구하고 있는 모습. 인터넷 캡처
지난해 11월 김지수, 성준용, 최태준 3명이 강원 춘천 의암호에 빠진 차량 운전자를 구하고 있는 모습. 인터넷 캡처

다행히 운전자가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줬는데 그건 못 보고 계속 팔만 흔들고 있었죠. 평소 훈련하던 대로 운전자의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안는 자세로 물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2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드라마. 김씨는 조금만 늦었어도 차와 함께 운전자 여성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생명을 구한 주인공이었지만 셋은 덤덤해 했다. 운 좋게 호수와 가까운 운동장에 있었고, 수영에 능숙했기에 해낸 일이라고. 최씨는 “구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보다 그냥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친구들도 큰 힘이 됐다. “혼자였다면 당황했겠지만 같이 있으니 믿고 의지할 수 있었죠. 물론 저보다는 좀 못하지만요. 하하.”

재난과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시민의 안전을 지켜내는 ‘영웅’은 신화와 마블(Marvel) 만화책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엔 또 다른 ‘의암호 의인 삼총사’들이 마지막 안전망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17일 밤 3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북 군산 장미동 주점 방화 사건 현장에서도 연기에 질식한 환자들을 묵묵히 병원으로 업어 옮긴 시민 영웅들의 수줍은 선행이 빛났다고 한다. 우리동네 어벤져스(Avengers)를 소개한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자동으로 움직였다

지난달 12일 지인을 만나러 인천 집에서 경기 평택으로 가던 중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운전자가 의식을 잃은 채 달리고 있는 차량에 고의 추돌해 운전자의 목숨을 구한 한영탁씨가 자신의 차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신상순 선임기자, 일러스트=송정근 기자
지난달 12일 지인을 만나러 인천 집에서 경기 평택으로 가던 중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운전자가 의식을 잃은 채 달리고 있는 차량에 고의 추돌해 운전자의 목숨을 구한 한영탁씨가 자신의 차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신상순 선임기자, 일러스트=송정근 기자

건설 현장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한영탁(46)씨는 지난달 12일 오전 경기 평택으로 가던 중 서해안 고속도로 조암 분기점 인근에서 앞서가는 차가 중앙 분리대를 긁으며 달리는 모습을 보고 경적을 눌렀다. “졸음 운전을 하나 싶어 깨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차 옆을 지나며 창문을 보니 운전자가 제대로 앉아 있지 않은 것 같았어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차를 가로막았죠.”

경찰에 따르면, 평소 지병을 앓던 해당 차 운전자는 전날 과로까지 겹치며 운전 중 의식을 잃었다. 한씨는 고의로 추돌 사고를 일으켜 차를 멈추게 한 뒤 운전자 상황을 살피러 갔다. 운전자의 몸이 조수석 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조수석 유리창을 깨려고 주먹으로 여러 차례 내리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신도 모르게 ‘망치’를 외쳤고, 사고 상황을 보고 달려온 다른 차 운전자로부터 건네받은 망치로 조수석 유리창을 깼다. 운전자는 눈만 살짝 뜬 채 몸은 꿈쩍도 못 했다. 한씨는 즉시 기어를 중립(N)으로 바꾸고 시동을 껐다. “운전자가 쓰러진 채 차가 계속 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마침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이 몸이 알아서 움직인 거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또 다른 사고가 걱정될 수도 있지만 한씨 눈에는 오직 쓰러진 운전자와 멈춘 차만 보였고 의식의 판단 이전 자동으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울트라 슈퍼 파워를 쓰고 사흘 앓았다

2일 아침 출근 길에 운전자가 의식을 잃은 채 주택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차량을 향해 달려가서 멈추게 해서 운전자를 구하고 더 큰 추가 사고를 막은 기아차 영업사원 손호진씨가 14일 기아차 본사에서 열린 모범상 시상식에서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다. 일러스트=송정근 기자, 사진= 기아차 제공
2일 아침 출근 길에 운전자가 의식을 잃은 채 주택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차량을 향해 달려가서 멈추게 해서 운전자를 구하고 더 큰 추가 사고를 막은 기아차 영업사원 손호진씨가 14일 기아차 본사에서 열린 모범상 시상식에서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다. 일러스트=송정근 기자, 사진= 기아차 제공

손호진(35)씨는 지난 2일 오전 사무실로 향하던 중 충남 보령시 동대사거리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신호 위반을 한 승합차 한 대가 승용차와 추돌 후 도로를 따라 한 바퀴 굴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선 승합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조수석에 탑승한 할머니가 밖으로 튕겨져 나왔는데, 운전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것이다. 운전자가 사고를 내고 도주를 하려는지, 아니면 의식을 잃어서인지 잠시 지켜보던 손씨는 차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승합차를 향해 뛰었다. 승합차가 갈지자로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운전자는 사고로 의식이 없고, 그대로 둔다면 내리막 끝 주택가를 덮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람도 차량도 많이 다니는 곳이라 대형 사고가 날 수 있겠나 싶었어요. 더구나 전복됐던 차라고 하기엔 차가 멀쩡해 보여 더 위험한 상황이었죠.“

진행 방향을 확인하고 차 속도를 가늠한 뒤 달려가 시동을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울과학기술대 자동차공학과를 나와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일해온 손씨. 그는 아마추어 레이싱 선수로 트랙을 달릴 정도로 차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200m 이상 뛰어가 운전석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아뿔싸! 안에서 잠겨 있었다. 다시 조수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할아버지가 사고 충격으로 몸이 조수석으로 쏠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 문을 열면 밖으로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창문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차의 창문으로 몸을 집어넣은 뒤 운전석 쪽으로 숙여 키를 손으로 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눈을 떠 손으로 키를 가리켰다. 손씨는 “돌리세요”라고 외쳤다.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 할아버지는 키를 돌려 시동을 껐고, 손씨는 기어 레버를 주차(P)로 옮겨 가까스로 차를 세웠다.

얼굴이 피범벅인 채 눈만 껌벅이던 할아버지는 주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주행 중인 차를 달려가 세워 인명을 구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니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목 뒤가 뻐근하고 장딴지 앞쪽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했다. 체력에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 있었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감당이 안 되는 힘을 썼기 때문인지 손씨는 이후 사흘 동안 앓았다.

낯선 이들과 찰떡 호흡으로 목숨을 구하다

지난해 11월 지하철 안에서 의식을 잃은 남성을 얼굴도 모르는 소방 공무원들과 함께 구해 낸 서울성모병원 김지운 간호사는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지하철 의인’으로 선정됐다. 김 간호사는 당시 스마트폰 플래시를 조명으로 이용해 쓰러진 남성의 맥박, 동공을 체크했다.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서울성모병원 제공
지난해 11월 지하철 안에서 의식을 잃은 남성을 얼굴도 모르는 소방 공무원들과 함께 구해 낸 서울성모병원 김지운 간호사는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지하철 의인’으로 선정됐다. 김 간호사는 당시 스마트폰 플래시를 조명으로 이용해 쓰러진 남성의 맥박, 동공을 체크했다.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서울성모병원 제공

서울성모병원 내과중환자실의 5년차 간호사 김지운(25)씨는 지난해 11월 8일 위기에 처한생명을 구하고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지하철 의인’ 표창을 받았다. 김씨는 비번일이던 이날 친구를 만나러 탄 4호선 지하철에서 ‘심정지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방송을 듣고, 곧바로 남태령역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심정지 환자의 골든타임은 4분. 그 시간이 지나면 생명을 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제세동기를 찾는 방송이 거듭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간 객차에 도착하자 바닥에 한 남성이 쓰러져 있고 또 다른 남성 2명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김씨는 곧바로 쓰러진 남성의 맥박과 동공 반응을 체크하며 의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스마트폰 플래시를 즉석에서 활용했다. 잠시 후 남성을 열차 밖으로 옮겨 거듭해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김씨는 계속해서 환자 맥박을 확인했고, 다행히 환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쓰러진 남성의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연락해 상황과 위치를 알려 주고 병원으로 이송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남성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지하철은 떠났지만 주변은 정리가 필요했다. 김씨는 토사물과 환자의 양말 등으로 어수선해진 바닥을 역무원과 함께 치우고 함께 환자를 도운 두 남성과 인사를 나눴다. 알고 보니 이들은 소방대원들이었다. 평소 몇 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지만 병원 밖에서 위급한 상황을 맞기는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울 법도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처음 보는 분들과 ‘제가 이걸 할게요. 이걸 좀 해주세요’라며 손발을 맞춰 목숨을 구했다니 신기할 따름이죠. 환자분이 병원으로 이송된 다음 서로에게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각자 갈 길을 가면서 이런 일이 또 있구나 했어요.”

다시 일상으로 왔지만 달라진 의인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 위기에 빠진 도시를 구한 뒤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듯 우리 동네 영웅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웃을 돕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했던 경험은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투스카니 의인’ 한영탁씨가 지난달 12일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의식불명 운전자의 차량에 고의추돌해 운전자의 목숨을 구했을 당시 탔던 투스카니 차량을 가리키고 있다. 현대차는 한씨에게 신형 벨로스터 차량을 제공했고, 한씨는 대신 투스카니를 차량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넘겼다. 인천=신상순 선임기자
‘투스카니 의인’ 한영탁씨가 지난달 12일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의식불명 운전자의 차량에 고의추돌해 운전자의 목숨을 구했을 당시 탔던 투스카니 차량을 가리키고 있다. 현대차는 한씨에게 신형 벨로스터 차량을 제공했고, 한씨는 대신 투스카니를 차량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넘겼다. 인천=신상순 선임기자

한영탁씨는 한 치킨회사가 의로운 행동을 기리고자 제공한 치킨 쿠폰 200장을 주민센터를 통해 마을 어르신들과 불우한 아이들에게 주기로 했다. 사고 당시 탔던 투스카니 차량은 지인 소개로 차가 필요한 사람에게 넘기기로 했다. “평소 욕도 하고 그랬는데, 여기저기서 의인상을 주시니까 저도 모르게 조금씩 달라졌어요. 담배꽁초도 함부로 못 버리고요. 착해졌다고나 할까요.”

남을 돕는 일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점도 알게 됐다. 손호진씨는 자신은 원래 남을 돕는 성향이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이 진정한 의인도 많을 텐데 블랙박스 덕에 자신이 의인이 됐다고 놀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태어나 처음 들은 의인이라는 말이 제 생각을 달라지게 한 것 같아요.” 7년 가까이 영업 직원으로 일하며 자신도 모르게 배려가 몸에 밴 것 같고 그것이 이번 일을 겪으며 드러났다고 했다.

‘의암호 의인 삼총사’인 김지수, 성준용, 최태준씨가 1월 1일 새해 첫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셀카를 함께 찍고 있다. 최태준씨 제공
‘의암호 의인 삼총사’인 김지수, 성준용, 최태준씨가 1월 1일 새해 첫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셀카를 함께 찍고 있다. 최태준씨 제공

남 돕는 일의 재미와 보람도 새삼 알게 됐다. 성준용씨는 요즘 매일 학교가 있는 군산으로부터 왕복 2시간 이상 걸리는 전주에서 장애인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있다. 수영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옷 갈아입고 이동하는 과정 하나하나 챙겨주다 보면 2시간이 훌쩍 간다. 대학 신입생의 낭만과 재미를 조금 포기하는 대신 장애인을 돕는 게 스스로도 신기하다. “선배 소개로 장애인 수영반 보조 교사를 하면서 재능을 찾은 것 같아요. 장애인 친구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게 일반인보다 몇 배 힘들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대회에 나가 상 타는 것을 보면 재미도 있고 친구들도 저랑 있는 걸 좋아하고요.”

최태준씨는 지난해 12월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날은 어찌어찌 사람을 구했지만 앞으로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생각을 해 봤어요. 분명 또 도울 것 같은데 그때는 혼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제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지운 간호사는 누구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며 이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 가족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죠. 그리고 바로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 나타나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 이웃의 가족이 위기에 처했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나요. 우리 모두가 의인이 되는 것이죠.”

의인은 또 다른 의인을 부른다

17일 전북 군산 장미동 화재 현장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16번 버스에 부상자들을 태우고 군산의료원으로 빠르게 옮겨 치료를 제 때 받을 수 있게 도운 버스기사 이해성씨.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이해성씨 제공
17일 전북 군산 장미동 화재 현장에서 자신이 운전하던 16번 버스에 부상자들을 태우고 군산의료원으로 빠르게 옮겨 치료를 제 때 받을 수 있게 도운 버스기사 이해성씨. 일러스트=송정근기자, 사진=이해성씨 제공

전북 군산에서 11년째 버스 운전을 하고 있는 이해성(60)씨는 17일 오후 10시27분 16번 버스를 몰고 장미동 인근 도로를 지나다 한 교통경찰이 다급한 목소리로 번호(전북 71자 2010)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차를 세웠다. 인근 상가에서 큰불이 났는데 부상자들이 많아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오른쪽 창으로 내다보니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보였다. 교통경찰의 요청으로 탑승했던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리고 잠시 후 소방관들이 환자 2명과 보호자 2명을 버스로 옮겼다.

“동군산병원 등 가까운 병원은 많은 부상자가 옮겨지고 있으니 좀 떨어져 있는 군산의료원으로 이송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평소 다니던 노선이 아니었지만 신기하게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내비게이션 화면이 그려졌어요. 부상자들이 연기를 많이 마신 상태라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버스지만 이씨는 마치 응급구조대의 앰뷸런스를 운전하듯 마구 달렸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 입구에 버스를 세웠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부상자를 업고 응급실로 옮겼다. 다행히 이씨의 신속한 이송으로 부상자들은 무사히 치료를 받았다. 이씨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부상자들의 응급처치와 이송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들의 빛나는 시민 정신이 더 큰 피해를 막았다며 박수가 쏟아졌다.

정작 이씨는 “30년 가까이 쌓아 둔 마음 속 빚을 갚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30년 전 이씨는 두 형과 함께 차를 타고 눈이 쌓여 있는 길을 가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맞은편에서 오던 차량과 부딪히는 큰 사고를 당했다. 3명 모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형제들을 싣고 병원으로 옮겼다. 안타깝게도 둘째 형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큰형과 자신은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 “얼굴도 모르는 분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죠. 그분의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 수 없을까 했는데 운명처럼 경찰이 제 버스를 세웠어요. 7분 전에 지나갔던 같은 번호 버스는 그냥 지나가라고 했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죠. 결과가 좋아 다행입니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와도 또 한 번 달려야죠.”

춘천=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한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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