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한국시간) 오전 벨기에와 파나마의 2018 러시아월드컵 G조 1차전이 열린 소치 파시트 스타디움. 이날 월드컵 본선 무대에 데뷔한 파나마를 상대로 후반 24분과 31분 연속 골을 몰아넣으며 벨기에의 3-0 완승을 이끌며 경기 최우수선수(Man Of The Match)로 선정된 로멜로 루카쿠(25ㆍ맨체스터유나이티드)는 경기 후 다른 수훈선수들과는 사뭇 다른 소감을 전했다. “내 실패를 바라는 사람이 참 많은데,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오늘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줬다.” 기쁨보단 후련함이, 애국심보단 자국에 대한 원망이 더 짙게 묻어난 소감이었다.
가시 돋친 루카쿠의 소감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벨기에 사회와 언론을 겨냥한 ‘한 방’ 이었다. 월드컵에 앞서 그는 인터뷰를 통해 “내가 좋은 경기를 할 때면 벨기에 언론은 나를 ‘벨기에 공격수’라 부르지만, 부진한 날엔 ‘콩고의 피가 흐르는 선수’로 바꾼다”고 불만을 내비친 바 있다. “부드럽게 말해달라”는 부탁이 오면 “나를 키운 건 분노”라며 단호히 거절해 왔다.
루카쿠가 이처럼 불 같은 분노를 품은 데는 어린 시절부터 벨기에 땅에서 겪었던 가난과 인종차별이 큰 몫을 했다. 그는 스포츠선수 기고매체인 플레이어스 트리뷴에 최근 게재한 기고문에서 “내가 품은 첫 목표는 벨기에 리그 안더레흐트에서 축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며 “그 배경엔 어린 시절 자신을 지배했던 극심한 가난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6세 때 가족이 파산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식비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어머니는 루카쿠의 우유에 물을 탔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유소년 축구를 시작한 뒤로부턴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냔 의심이 이어졌고, 급기야 11세 땐 다른 부모가 그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신분증을 요구해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다고 그는 밝혔다.
그럼에도 루카쿠는 가족의 사랑 속에 숱한 위기를 견뎌오며 벨기에 ‘황금세대’의 어엿한 리더로 자리잡았다. 그는 “지금도 외조부로부터 ‘내 딸(루카쿠의 어머니)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약속하겠다’고 답한 12세 때 전화통화를 기억한다”면서 “부디 한 번만 더 통화해 성공한 내 근황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루카쿠는 첫 경기에서 두 골을 터뜨리면서 일찌감치 이번 대회 골든 부트(득점왕) 후보로도 떠올랐다. 1986 멕시코월드컵 성적(4위)을 넘겠다는 벨기에 대표팀 목표가 현실이 된다면 그의 득점왕 꿈도 한 발 더 가까워진다. 루카쿠가 두 마리 토끼(4강 이상ㆍ골든 부트)를 잡는다면, 벨기에 사회에 인종차별 문제를 각성시키는 또 한 마리의 커다란 토끼가 따라올 지도 모를 일이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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