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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민중의 변호인’ 조영래가 살려낸 여성인권

입력
2018.06.19 14:19
수정
2018.06.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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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조차 ‘여성인권’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대의 속박에 갇혀 무거운 삶을 짊어져야 했던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조영래. ‘사람 냄새 나는 변호사’로 살았던 그의 짧았던 생을 한국일보가 돌아봤습니다.

기획ㆍ 제작 : 박지윤 기자

법전을 펼친 지 1년 만에 사법시험의 문턱을 넘었지만, 연수원 문턱을 넘는 데는 장장 11년이 걸렸다. 청년은 변호사가 아닌 피고인으로 들어간 첫 법정에서 내란죄를 뒤집어쓴 채 꼼짝없이 정치범이 됐다. 1년 반은 감방의 수인으로, 6년은 수배자로 살았다.

그렇게 20대를 넘기고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넷. 물난리로 길거리에 나앉은 수재민, 연탄공장 옆에 살다 폐병에 걸린 달동네 주민… ‘민중의 변호인’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짧은 8년.  조영래는 거악에 텅 빈 구호로 맞서는 대신 그 아래 깔린 ‘사람’의 편에 섰다. 

언제나 약자들의 편이었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멈춘 곳은 여성의 삶. 여성조차 ‘여성인권’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 1세대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조영래는 사실 ‘대한민국 1호 여성인권변호사’이기도 했다.

‘결혼한 여자는 어차피 회사를 그만두니 당신의 정년은 평균 결혼 연령인 26세 이전까지다’ 198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전화교환원 이경숙(당시 22) 씨는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조기정년제’ 판결을 받는다. 

'25세 이후로는 가정주부로 살아갈 터인데, 가정주부는 일정한 수익이 없으므로 도시 일용노동자의 임금에 준하여 일당은 4천원으로 계산한다' 급기야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최하위 생계유지 노동’ 임금으로 일률적으로 못 박아 버린다. 

사법부의 판단은 당시 여성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결혼퇴직제를 정당화시킨 사법부는 시대착오적 판결을 즉각 철회하라!” 분노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조용히 사건의 항소심 수임을 자청한 변호사가 있었다. 조영래였다. 

이경숙이라는 개인을 넘어 한국 여성 전체의 권익과 직결되는 사건이라고 판단한 그는 수임료도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지금껏 그래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이후 직업활동의 자유까지 빼앗겨 버린 여성들을 열렬히 대변했다.  

"이 판결의 근저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을 백안시하고 가사노동 전념을 미덕으로 보는 전통시대적 남성지배적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  변화하고 있는 시대상까지 담아낸 의견서는 사실 재판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성과 남성 모두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묶여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에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문귀동입니다.” 1986년 11월 21일 인천지법 법정은 눈물바다였다. 변론요지를 낭독하는 변호인 조영래도, 수의를 입은 채 피고인석에 앉은 앳된 얼굴의 여대생도, 방청석을 가득 채운 어머니들도 울고 있었다.

1985년 봄, 서울대 4학년생이었던 권인숙은 부천의 한 공단에서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위장취업을 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됐다. 이곳에서 권씨는 수사관 문귀동과 단 둘이 남은 조사실에서 각종 변태적인 성고문을 당한다. 

권씨를 범한 이는 문귀동뿐이 아니었다. 경찰은 제 식구를 감싸는 것도 모자라 권씨를 무고로 고소했고, 공안당국은 조용히 덮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검찰은 은밀하게 수사결과를 조작했다.

법원마저 명백한 진술들을 끝내 무시한 채 권인숙에게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내렸다.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 폭행만 했다’(조선일보 86년 7월 17일 자)는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뽑은 언론은 보도지침을 따르는 중이었다.

조영래는 이 모든 조직적 만행에 맞섰다. 감옥에 간 후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한 권씨를 처음 접견한 그 순간부터였다. ‘변호사는 변론으로 말한다’는 상식을 깨고 법정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손수 고발장을 쓰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며칠밤을 꼬박 새우고 법정에서 개정을 기다리면서도 닳디 닳은 원고를 수십 번 고쳐 적었던 그는 변론 도중 끝내 눈물을 쏟았다. 변론문은 권씨 개인의 고난을 한국 여성 전체의 상처로 확장했다.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는 비겁한 편견에 대해 그는 답했다. 

“권양의 진실은 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둥대는 권력의 모습에 의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승리의 길로 전진을 거듭했습니다. 진실은 감방에 가두어둘 수가 없습니다.”

얼마 뒤 6월 항쟁을 계기로 분위기가 전환되자, 대법원은 1988년 2월 9일 뒤늦게 문귀동에 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인다.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6월, 문씨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조영래는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원한 것은 양식이 있는 사람, 눈물이 있는 사람, 우리 자녀들의 내일을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도의 요구였습니다.” 당연한 인권, 더 나아가 여성인권을 힘주어 말한 그의 변론 전문은 아직도 시대의 명문으로 남아 있다.

기획, 제작, 사진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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