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혁을 위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제도 개선 신호탄이라 여겨진 ‘기획법관제’ 개선 방침이 흐지부지돼 “없던 일로 됐다”는 일선 판사들의 지적이 나온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를 계기로 사법 수뇌부가 사법 관료화 단면이던 기획법관제 개선 뜻을 내비치고도 점차 후퇴하면서 개혁 의지가 퇴색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두세 달 전 각 법원장에게 기획법관이 해왔던 행정처 보고업무 관련 이메일을 보냈다.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고등부장)가 해당 업무를 꼭 하지 않아도 되고 별도 법관을 지정해도 된다’는 취지였다. 그 내용을 본 수도권 법원 소장판사는 “윗선에선 당연히 기획법관을 겸해온 공보관(판사)에게 계속 맡기는 게 편하니 달라질 게 없는 셈이고 실제 그렇다”고 말했다. “기획법관을 통해 보고 받거나 의사를 전하지 않기로 하고, 법원장 및 수석부장판사 등 사법행정 담당자를 통하겠다”(대법원 업무보고에서)는 행정처 초기 방침이 슬쩍 퇴보했다는 얘기다. 다른 일선 판사 몇몇도 “사무분담표에서 ’기획법관’ 직책만 빠졌지 기획업무 부담은 그대로”라고 했다. 인사 물갈이가 아닌 제도 쪽으로는 김명수 체제의 사법개혁 첫 작업이라 보고 사실상 ‘기획법관제 폐지’로 가닥이 잡히리라 기대한 일부 판사들은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는 분위기다.
기획법관은 법원에서 여러 행사 기획 등 행정업무를 맡고, 특히 법원행정처 요구에 보고하는 ‘창구’ 역을 맡는 판사로, 노무현 정부 시절 이용훈 대법원장 때인 2006년 공보 판사와 함께 생겼다. 법원 정책과 판결 취지를 외부에 잘 전달하려는 취지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법 관료화와 엘리트 라인 형성, 재판인력 낭비 등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쏠렸다.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 등 규모가 큰 법원에선 기획법관이 따로 있고, 지방 법원에선 공보관이 기획법관 역할을 겸해왔다.
이를 의식한 법원행정처도 올 2월부터 변화를 추진했다. 내부망에 “기획법관을 활용해 법원과 소통하는 방식을 탈피하겠다”고 공지했다. 다만, 기획법관 배치는 각 법원 ‘자율’로 넘겼다. 그러면서 3월에는 전국 법원장 간담회와 전국 수석부장판사 회의를 개최해 기획법관제 유지 여부를 논의했다. 행정처는 같은 달 열린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선 기획법관제 개선 의지를 보이며 경쟁적 보고의 원인이던 ‘월간 주요상황보고 폐지’ 계획도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의 행사 기획이나 상고법원 홍보 등 압박 탓에 담당 판사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일선 판사들은 대체로 보고 체계 등에도 실질적 변화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 판사는 “월간 보고를 하고 있고, 행정처에서 세부적인 주요 상황보고양식도 내려줬는데 예전과 대동소이하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판사도 “정기ㆍ수시 보고를 다하고 있다”며 “행정처도 정보는 파악해야 하니 기획법관을 없애지 못하면서 애매한 지침을 주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판사는 “일선 법원과 업무 협조상 필요성이 있지만 기획법관제 부작용이 크다는 법원 안팎의 인식이 퍼져 있으면 확실히 없애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법원장과 수석부장, 총무과장을 통한 법원과의 소통이 원칙이며, 사법지원을 위한 협조 부탁에 대응하는 법원 업무는 자율로 담당자를 정하라고 해서 이를 처리하는 법관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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