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슬하에서”가 자기소개서 첫머리를 장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가족 로망스는 아버지에게로 저울추가 기울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아버지의 부재로 고통 받고,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를 찾아 나서고, 아버지와 화해했다. 그러나 지금, 가족 이야기를 다룬 동화나 그림책 속에서 문제적 인물은 대개 엄마다. 아이들은 엄마와 갈등하고, 엄마를 비판하고, 엄마와 타협하고,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와 화해한다.
“우리 엄마는 별명이 불곰이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불곰처럼 빨개진다.” 그림은 입을 떠억 벌리고 포효하는 불곰. 책장을 넘기면 불곰을 똑 닮은 엄마가 고함을 친다. 쩌렁쩌렁 울리는 엄마 목소리에 집 주위에서 알짱대던 새벽어둠이 냉큼 달아난다. 경쾌하고 감각적인 그림과 옛날 이야기풍 제목이 흥미로운 조화를 이루는 그림책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도 우리는 불곰에게 쫓겨 후다닥 밥을 먹고, 후다닥 옷을 입고, 후다닥 집을 나왔다.” 화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아이에게 ‘우리’란 자신과 동생과 아빠다. 학교에서 아이는 ‘우리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동시를 짓는다. 재미난 얘기를 잘해 주는 아빠, 맛난 걸 선뜻 나눠 주는 동생, 까끌까끌한 혀로 기분 좋게 핥아 주는 순덕이. 아이는 아빠가, 동생이, 고양이가 좋은 이유를 척척 써내려 간다. “그런데/ 엄마는 왜 좋은지/ 모르겠다.”
엄마가 좋긴 한데 왜 좋은지를 모르는 걸까, 엄마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모르는 걸까. 한때는 자신의 온 우주였던 엄마를, 아이는 냉정하게 바라보며 평가한다. 이제 엄마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묻고, 동생에게 묻고, 아빠에게 묻는다. “엄마가 왜 좋아?”
그런데 아빠가, 재미난 얘기를 잘해 준다는 아빠가 난데없이 ‘엄마 불곰 설’을 주장하고 나선다. 옛날에 배낭여행을 하다가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불곰이 구해줘서 목숨을 건졌노라고. 고마워서 그 불곰과 결혼을 했는데 그게 엄마라고. 해가 뜨면 거죽을 벗고 사람 행세를 하지만 엄마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불곰이라고. 어라, 책 제목도 그렇고 이건 아무래도 곰나루 전설 같다. 곰나루 전설이라면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만 노리다가 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사내와, 새끼를 볼모로 돌아오라고 애원하다 새끼와 함께 물에 빠져 죽어버리는 암곰 이야기인데. 이런.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허은미 글∙김진화 그림 여유당 발행∙36쪽∙1만3,000원온종일 일하느라 퉁퉁 부은 다리, 갈라진 목소리, 쓰린 속을 끌어안고 엄마가 돌아온다. 꾸역꾸역 늦은 저녁을 먹는다. 불곰으로 변한다. 웅녀는 곰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었는데, 엄마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쩌다 불곰이 되었을까. 결혼은 함께 하고 아이는 같이 낳았는데, 왜 엄마는 불곰이 되었고 아빠는 여전히 사람인 걸까. 그래서 아빠는 곰나루 전설을 빌어다가 엄마는 처음부터 불곰이었다며, 자신은 전설 속 사내와 달리 도망치지 않는다며 죄책감을 조금쯤 덜어보려는 걸까.
외갓집 낡은 사진첩 속에서 나중에 불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조그만 아기가, 어여쁜 아가씨가, 아이와 꼭 닮은 아이가 우리와 눈을 맞춘다. 지하에서 웅녀 할머니가 가슴을 치겠다.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버티고 버텨 기껏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후손이 다시 곰이 되다니!
나긋나긋한 천사표 엄마가 꿈이지만 현실은 고함쟁이 엄마 신세인, 불곰 같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 억울한 이 땅의 엄마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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