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개최지 러시아에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경계령이 내려졌다. 일부 극단주의 성향 세력의 인종차별 행태가 훌리건(과격 축구팬)을 통해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다. 러시아와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영국의 경우 보복이 두려워 러시아 행을 포기하는 축구팬이 속출하고 있다.
12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러시아판 페이스북으로 불리는 브콘탁테(Vkontakte)등에서 러시아 축구팬을 중심으로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하는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 발언이 난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인권감시단체 SOVA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축구팬 사이에서 인종차별적 구호를 외치거나 나치를 추종하는 문구와 문양이 새겨진 응원도구를 사용하는 등 극우주의적 행태가 지난해보다 더 늘고 있다. 흑인선수들을 향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SOVA는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 및 코카서스 지역 출신과 흑인이 인종차별 타깃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와 프랑스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선 러시아 축구 팬들이 프랑스 선수에게 인종차별적 폭언을 퍼부어 논란이 됐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러시아축구협회에 우리 돈 3,200만원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하면서 러시아는 개최국으로서 단단히 체면을 구겼다.
공포감에 러시아 월드컵 관람 보이콧에 나서는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 이중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으로 러시아와 외교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영국이 특히 심하다. 영국 국가대표 흑인 수비수인 대니 로즈는 가족들이 봉변을 우려해 러시아 행을 가로막기도 했다. 두 나라 축구팬들의 충돌도 우려된다. 양국 훌리건들은 2016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5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러시아 관광사업 관계자를 인용해 영국 관광객의 수가 2014년 이후로 연평균 10%씩 줄어드는 가운데 최근 양국의 정치외교적 긴장까지 겹치며 영국인의 러시아 기피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흥행몰이가 시급한 러시아 당국과 FIFA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훌리건의 경기장 출입 자체는 허용하되 정부가 지급하는 신분증(ID) 카드를 지참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또 훌리건 전담 경찰 인력을 대폭 보강해 사전 단속에 나섰다. FIFA는 주심에게 3단계 처벌 권한을 부여했다. 경기장에서 인종차별 행위가 발각되면 그 강도에 따라 주심이 경기 일시중단, 방송 경고, 경기 몰수에 나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조치에도 회의적 시각은 여전하다. 당장 영국에선 러시아 훌리건 등 극단주의 세력들이 국가적 비호 아래 성장한 터라 러시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않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가디언은 “2016년 훌리건 유혈 사태 당시 러시아 여론은 이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서방 언론이 ‘루소포비아(러시아 공포증)’를 조장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상국 단국대 러시아어과 교수는 “극소수 스킨헤드들의 행태를 러시아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국민적 단합을 주문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등 세계적 이벤트를 성공시키겠다는 각오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WP도 모스크바 시 당국이 지하철마다 6개국 언어 지원 서비스에 나서거나 택시기사들에게 간단한 영어 표현을 훈련시키는 등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