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호랑이’ ‘로보캅’ ‘거북 사령관’. 마치 첩보영화에서 볼법한 이 이름들은 최근 중앙아메리카 니카라과의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다. 자유의 전당인 대학교에서 왜 가명을 쓰나 싶지만 이뿐 아니라 얼굴에는 복면을 쓰고 화염병과 사제 총기로 무장하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쉽사리 목격된다. 수도 마나과 등 대도시의 캠퍼스와 길거리에 경찰 및 친정부 무장조직의 총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니카라과의 대학생들은 약 7주 이상 이어져 온 반정부 시위의 중심에 서 있다.
라틴계 명칭인 ‘에라스모’라고 자신을 밝힌 마나과의 한 대학생은 시위 이유에 대해 “혁명의 장본인이 혁명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에라스모가 말한 배신자는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1979년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ㆍ현 집권당)으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가 민주화 투쟁을 통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1984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2006년 재집권한 오르테가는 최근 의회ㆍ언론 장악, 사법부 통제 등 민주주의를 급격히 후퇴시키며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타락하고 있다. 이에 산디니스타 세대의 자녀ㆍ손주인 현 청년들이 부모 세대의 대의를 이어 받아 또다시 투쟁에 나섰다. 학생들이 가명을 사용하는 것도 산디니스타 세대의 전통이다. 자신의 조부모가 산디니스타 투쟁에 참여했었다는 거북 사령관(21ㆍ여)은 “살인자 오르테가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청년 세대의 분노는 동료 학생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권단체에 따르면 11일 기준 일련의 시위로 140명 이상의 시민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했다. 학생 조직은 사망자 중 대학생 4명도 포함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위의 도화선은 지난 4월 오르테가 정부의 연금제도 개혁 시도였으나 경찰 진압 작전과 친정부 시위대의 공격으로 사상자 수가 계속 늘면서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번지는 실정이다. 반정부 진영은 오르테가, 그리고 그와 함께 집권한 부인 로사리오 무리요 부통령의 하야, 조기 대선, 선거절차를 바꾸기 위한 개헌 등을 요구하고 있다.
오르테가 대통령의 퇴진 가능성은 아직 높지 않은 상태다. 오르테가 대통령이 지난달 연금개혁을 철회한 후 추진한 야권ㆍ대학생ㆍ시민단체 대표 등 반정부 진영과의 대화는 실익 없이 끝났다. 그는 7일 종교계와 회동을 갖고 “민주화 제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2021년으로 예정된 5년 임기를 채우겠다는 의지는 꺾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르테가는 앞서 대학생 시위대에 대해 “어린애들은 자신들이 조종 당하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갱단 조직원들이 시위에 개입했고 시위를 범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유혈 충돌이 지속되면서 니카라과 경제 사정은 악화하고 있다. 니카라과경제사회개발재단(FUNIDES)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4.7%에서 1.7%로 하향 조정했다. FUNIDES는 만약 정치 불안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경제 규모가 2% 줄어들어 2009년 이후 첫 불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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