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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김유정역(金裕貞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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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김유정역(金裕貞驛)에서

입력
2018.06.12 19: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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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이리 붙이고 나니 곽재구 시인의 그 유명한 시 ‘사평역에서’를 흉내 냈다고 하겠다. 맞다. 하지만 사평역은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역이고, 김유정역은 실재한다. 수도권 전철인 경춘선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있다.

김유정역에 홀연히 섰다. itx청춘열차가 지나치는 역이라 그런지 인적은 뜸하다. 2010년 신축한 한옥 형태의 쾌적한 역사다. 김유정역은 참 유정(有情)한 역이다. 그 주인(1908~1937)의 짧은 생애처럼, 그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사연이 많다. 한국 철도 사상 처음으로 지역이 아닌 사람 이름을 붙인 역이다. 그건 지금도 유일하다.

처음부터 김유정에게 헌정한 역은 아니었다. 1939년부터 있던 신남역이 2004년에 앞동네 실레마을에서 생몰한 김유정에게 65년을 지킨 역명을 양보했다. 철도 당국이 사람 이름을 역명으로 허가한 적은 없었다. 김유정에게 평생을 미친 소설가 전상국(전 강원대 교수, 김유정문학촌장)의 덕이다. 그는 폐병쟁이에 총각귀신의 이름을 마을 역명으로 할 수 없다고 반대한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역사를 나와 노란 들꽃이 핀 철길을 따라 걷는다. 작고 소박한 김유정 구(舊)역사가 나온다. 폐역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았다. 시간은 정지됐다. 간이역은 왜 이리 오만가지 상념의 화수분일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는 절창으로 시작하는 사평역에서 야간열차는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시인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졌다. 민초들은 여기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렸으리라. 무쇠 난로가 큰 주전자를 얹은 채 떡하니 대합실 가운데 정좌해 추억을 소환한다.

폐선로에는 운행을 멈춘 기차 두 량이 북카페로 변신했다. 몇몇이 선반에서 낡은 시집을 꺼낸다. 봄날은 갔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인 청춘을 싣고 날랐던 그 삼등삼등 완행열차다. 그 시절 질풍노도 아닌 청춘이 어디 있었으랴.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목 놓아 부른 불후의 연가와 통기타 가락은 어느 녹슨 바퀴 틈새에 서려 있을까.

이곳 실레마을은 김유정의 성채다. 마을 전체와 한들(들판), 팔미천, 주변의 금병산 자락이 김유정 문학의 배경이자 산실이다. 그의 소설 31편 중 12편이 여기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다. 연애가 뭔지도 모르던 내가 조숙한 점순이에게 떠밀려 ‘알싸하고 향긋한 노란 동백꽃 속에 파묻혀 땅이 꺼지는 듯 온정신이 아찔했던’ 동백숲길(‘동백꽃’)도 남아 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했다. 금병산 자락에 조성한 ‘금따는 콩밭길’ ‘봄ㆍ봄길’ ‘산골나그네길’ 같은 열여섯 마당 실레이야기길은 김유정 작품을 따라가는 문학기행이다.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문학세계를 정리해 놓은 김유정 문학촌에 가 봤다. 해설사는 김유정을 이렇게 말했다. “일제 강점기 우직하고 순박한 농촌 소작인의 가난과 비참을 해학과 서정과 반전으로, 감칠맛 나는 토속어로 그려 낸 김유정은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요, 30년대 한국 문학의 축복입니다.”

실레마을은 온통 문학과 예술의 세례를 받은 곳이다. 김유정 문학제, 김유정 문학상, 김유정 문학캠프, 야외공연, 공예체험, 실레마을 이야기잔치 같은 행사가 연중 줄을 잇는다. 화가와 작가 도예가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금병산예술촌을 만들었다.

김유정은 실연의 상처(당대의 명창이자 네 살 연상인 박녹주에게 수많은 연서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와 모진 폐병을 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스물아홉 어느 봄날 새벽, 달빛 속에 하얗게 핀 배꽃을 바라보며 스러졌다. 죽어서 고향의 역이름으로 환생할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이게 문학의 생명력인가. 김유정역은 행복한 역이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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