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 법원 대표 판사들이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뒷수습 방안으로 “형사 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책임 추궁”을 결의하면서 전국 법원장 등 최고참 법관들이 “수사할 사안이 아니다”며 꺾었던 수사 불가피 기류가 되살아났다. 다만, 법관대표회의가 고발이나 수사 의뢰 등 사법 수뇌부의 적극적 조치를 요구한 것은 아니어서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공간을 열어둔 것으로 보인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11일 오후 2시 30분부터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한 전국법관대표회의 선언’을 어떤 수위로 공표할지를 놓고 6시간 남짓 마라톤 논쟁을 벌였다. 판사들이 “정말 지치네요”라며 속내를 주저 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장시간 격론이 오간 대목은 사법부 전체가 신경을 곤두세워온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 형사조치’ 여부 의결이었다. 법관대표회의 선언 관련 안건의 세 번째 항목인 ‘형사조치’ 여부를 두고 소장판사들의 강력한 ‘문구 포함’ 요구가 있었다고 전해졌다. 한 판사는 “형사조치 관련 사안만 2시간 넘게 논쟁했다. 가장 민감했다”고 말했다. 회의실 앞쪽 스크린에는 형사조치와 관련해 ‘수정안1, 수정안2’ 등 비슷한 문구들이 담긴 3개 이상 안들이 공개됐고 판사들은 저마다 의견을 쏟아냈다.
격론 끝에 민감한 대목은 빼고 무난한 표현들로 대폭 수정됐다고 한다. 우선 일선 법원의 소장판사(단독ㆍ배석판사)들이 잇따라 결의문에 담아낸 ‘수사 촉구’라는 문구는 담기지 않았다. 일선의 ‘성역 없는 수사’ 부분도 ‘성역 없는 진상조사’ 정도로 달라졌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석한 한 부장판사는 “’수사’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있는 (판사) 대표들이 있어서 그 부분을 희석시키려 한 듯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형사절차를 포함’이란 문구로 타협점을 찾았다는 얘기다.
전국법관대표회의 간사는 이를 수사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특별조사단 실무를 이끈 김흥준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고등부장)이 이날 오전 질의응답을 받으며 “강제력 없는 임의조사로 모든 사실 관계를 규명할 순 없었다”고 한 설명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법관들은 설명하고 싶다며 회의장을 찾은 특별조사단 관계자들을 상대로 거침 없는 질문공세를 폈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을 직접 조사하지 못해 부실한 인적 조사 의혹을 받게 된 이유를 묻기도 했다. 이에 김 감사관은 “퇴직자라 임의조사 한계가 분명했다”고 답했다. 전국 법원장들이 이달 7일 간담회에서 “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은 것과는 달리 ‘셀프 조사’ 한계를 되짚은 셈이다. 그러면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삼권분립까지 위협하는 문건 작성 주도자면서 징계를 피하고 퇴직한 자에 대해 형사조치를 포함한 책임추궁에 뜻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법관대표회의는 사법부의 고발, 수사의뢰 등은 언급하지 않으며 김 대법원장이나 현 행정처의 부담을 덜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사법부의 적극적 조치가 있을 시 향후 재판부가 안게 될 짐도 고려했다는 평가다. 앞서 변호사ㆍ교수 등이 주축인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위원회 간담회에서도 “수사 불가피” 의견이 다수였지만, 사법부의 적극적 조치에는 반대 목소리가 많았다. 특별조사단이 조사보고서에 인용한 문건 파일 410개 공개 요구 문제를 두고는 회의 시간 부족 등을 이유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의결 사항보고를 검토하고, 조만간 대법관들과의 비공식 면담을 최종적으로 거친 뒤 이르면 주중 관련자 형사조치 여부와 방식 등을 포함한 후속조치를 발표한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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