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총회가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채택한 것은 1948년 12월 10일이고 국제 인권의 날도 그날이지만, 유엔 인권위원회의 선언문 기안위원회(drafting committee)가 2년여 논의 끝에 선언문을 탈고한 날은 48년 6월 18일이다. 위원장 엘리너 루스벨트 등 기안위원 9인은 프랑스 인권법률가로 68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르네 카생(Rene Cassin),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레바논 출신 철학자 겸 신학자 찰스 말리크(Charles Malik), 모스크바대 교수 출신의 소비에트연방 외교관 알렉산더 보고몰로프(Alexander E. Bogomolov) 등이었다. 동양 인권사상을 대표한 이는 인권위 부의장이던 대만 극작가 장팽춘(張彭春)이었다.
1차대전 뒤인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의 규약에는 식민지 후견제도와 남녀ㆍ아동 공정노동 조항 외 보편 인권규정이 없었다. 2차대전 직후인 45년 출범한 유엔은 1941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연설에서 언급한 4가지 자유 즉 언론ㆍ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궁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기초로 인종ㆍ성별ㆍ언어ㆍ종교에 따른 차별을 극복하자는 문구를 유엔헌장 1조 3항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국제사회는 인권에 대한 보다 선명한 헌장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 46년 6월 인권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립했고, 선언문 기안위원회를 만들었다. 유엔사무국 인권국장이던 캐나다 출신 존 험프리(John Jumphrey)가 초안을 썼고, 세찬 논의가 진행됐다. 쟁점도 없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자인 말리크 등이 가정의 가치를 강조했고, 파시즘과 나치즘을 경계하자는 조항을 삽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48년 5월 수정 문안은 다시 인권위원회와 경제사회이사회의 연석회의에 회부돼 또 한 차례 수정 작업을 거쳤다. 그 과정을 거쳐 70년 전 오늘 선언문이 탄생했다.
총회 표결에서 58개 회원국 중 48개국이 찬성하고, 2개국(온두라스, 예멘)은 불참했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종교 선택의 자유 조항과 결혼평등 조항 때문에, 소련과 체코 등 동구 6개국은 나치즘 조항의 미비를 들어 기권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소비에트가 기권한 진짜 이유는 국내외 거주 이전의 자유를 규정한 13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