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술대학의 실기수업 중 누드모델 사진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온라인 공간을 달군 사건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숱한 논쟁이 오고 갔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 하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세상에는 그릴 만한 대상이 널렸다. 누드모델을 그리지 않아도 미술을 배울 방법은 많다. 그럼에도 미술대학에서 굳이 누드 드로잉을 가르치는 이유는 뭘까?
옛날에는 누드화 자체가 순수한 예술이었다. 나아가 금기에 대한 전복이던 때도 있었다. 예술적 이상을 표현하는 누드는 알몸(naked)과 다른 개념이라며 케네스 클라크가 입을 털고 다닐 무렵, 전통적으로 십장생이나 사군자를 그리던 동아시아에선 누드가 강력한 금기였다. 그래서 근대미술로서 누드를 다루던 중국 화가들은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화혼’에 나오듯 줄줄이 잡혀 갔다. 비슷한 시기 일제 치하 조선에도 김관호라는 걸출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전시를 방해받고 신문 보도조차 통제되는 시대에 금기시되는 누드화를 계속 그렸으매, 그것도 하나의 저항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것은 백 년이나 지난 이야기다. 어느새 누드든 알몸이든 흔하다 못해 넘쳐 나는 시대가 됐다. 전시회에서 누드화를 보아도 놀라는 사람이 없다. 그러려니 지나가고 만다. 물론 21세기에도 검찰이 최경태 작가의 작품을 뜯어 가 태워 버린 일이 있다. 이구영 작가처럼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누드를 그렸느냐의 문제이지 누드 자체가 사회에 주는 위협 때문이 아니다. 작년, ‘테이트 명작전’에서 내가 만난 중학생들조차 여러 점의 누드 작품을 보고도 별 감흥을 내비치지 않았다. 숙제만 아니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했을 따름이다.
이제 누드 드로잉 수업의 목적은 예술의 자유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단지 실용적인 이유, 요컨대 그림 그리는 기술을 배우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깝다고 말해야 할까? 학생들은 수업을 통해 사람의 신체와 움직임을 그리는 방법을 익힌다. 좋은 훈련이다. 그런데 이런 훈련이라면, 그리려는 모델이 속옷이나 타이즈를 입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예 옷을 갖춰 입은 모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풀거리는 드레스나 찢어진 청바지처럼 그리기 어려운 옷을 입은 모델이 차라리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은 온갖 참고자료가 비근하다. 사진자료나 도록이 도처에 있다. 미술학도를 위한 전문 애플리케이션도 많다. 가상 인체의 자세, 체형은 물론, 보는 시점까지 조절할 수 있고 근육해부도까지 보여 주는 어느 애플리케이션은 크로키 연습을 위해 30초마다 다른 자세가 나오게끔 설정할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직접 보는 방식과 사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방식에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그 차이는 사람의 눈보다 렌즈가 훨씬 ‘뛰어나졌다’는 데서 기인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제 누드 드로잉 수업의 마지막 효용은 인식 판단 훈련이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볼 때 무엇이든 정념을 가지게 마련이다. 가령 차에 치여 길섶에서 죽어 가는 새끼 고양이를 보았을 때 드는 마음이 있다. 그 고양이를 그림으로 그릴 때는 정념을 제거하고 형태와 질감, 비례와 음영만 판단하게 된다. 이것이 미술강사들이 학생들에게 흔히 주문하는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말의 뜻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합리적 판단(가령 ‘1+1=2’ 같은 것)이나 도덕적 판단(“친구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은 나쁘다” 같은 것)과는 다른 미적 판단의 영역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죽어 가는 새끼 고양이를 실기실에 놓을 수는 없으니, 대신 정념을 제거할 대상으로 누드모델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런 수업을 배우지 않고도 세 가지 인식판단을 정확히 나누어 할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으니, 누드 드로잉 수업의 필요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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