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화장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하다 못해 남자친구의 집에서까지 ‘도촬’의 위협에 시달립니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흔한 충고조차 무방비로 찍혀 나도 모르게 유포되는 디지털성범죄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데요. 당당히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를 외치며 모니터 뒤에 숨은 성범죄자들을 집요하게 쫒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일보가 이들을 만나봤습니다.
기사 원문, 제작 : 박지윤 기자
그들의 일상을 겨눈 렌즈는 어디에나 있었다. 출근길에 잠시 들른 지하철 화장실에도, 골목 건너 앞집의 창문에도, 지나가는 누군가의 손아귀에도, 어쩌면 지난 주말 머문 남자친구의 집 어딘가에도. 옆집 누나, 전 여친, 여동생 앞에 더러운 수식어가 나붙었다. 서로의 기억에만 남았다고 믿었던 사랑의 순간들은 ‘G컵녀’ ‘헌팅녀’라는 이름으로 무한 재생됐다.
“여자가 몸을 그렇게 헤프게 굴렸으니 그 사달이 나지” 무너진 여자들에게 세상은 말했다. ‘잘못은 조심하지 않은 너에게 있어.’ 손가락질하는 국가 대신 발 벗고 나선 이들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 떠도는 ‘리벤지 포르노’를 삭제해 온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활동가들.
“'국산 야동이 아니라 범죄 영상이다’. 오직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206명의 피해자들이 저희 단체의 문을 두드렸어요.” 벼랑 끝에 선 여자들의 표정은 절박했다. “지워도 지워도 계속 나와요. 끝이 없어요.”
피해자는 200여 명이었지만 지운 영상의 수는 수 만개. 한 개의 영상이 수백 개의 사이트에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가는 탓. " ‘골뱅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만취한 심신 미약 상태의 여성을 강간하는 영상이에요. 엄연한 범죄 증거물인데도 인터넷에선 이미 하나의 ‘취향’으로 소비되고 있죠.”
독하게 매달려 하나하나 없애 나가도 엉뚱한 이름을 달고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워낙 재유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갑자기 ‘일본산 야동’으로 탈바꿈해서 다시 퍼지기도 해요.” 바퀴벌레 같다는 말이 딱. 언제고 다시 무섭게 번식하는. 피해자들의 고통도 끊임없이 재생산돼 그들의 삶을 갉아먹는다.
“피해자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데, 처벌이 안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성폭력처벌법 14조에 해당하는 ‘카메라등이용촬영죄’의 1심 양형을 살펴보면 실형을 산 사람은 전체의 약 5%에 불과.
그나마 솜방망이라도 휘두르려면 적극적인 수사관을 만나는 천운이 따라야 한다. “ 전 남자친구가 영상을 직접 유포했다는 정황적 증거가 충분했는데도 경찰은 ‘내가 안 올렸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진술만을 증거로 인정했어요." 촬영물이 올라온 플랫폼이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포르노 사이트였기 때문. 가입자의 정보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가해자 특정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
“최소한 가해자로 추정되는 전 남자친구의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압수해서 해당 영상이 아직 남아있는지, 다른 촬영물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게 ‘수사’라는 겁니다. ‘나 안 했어요’라는 뻔한 얘기를 듣고 돌려보내는 건 수사가 아니죠.”
경찰이 내미는 단골 핑계는 “해외 서버라 못 잡는다”는 것. 국내불법 포르노 사이트는 주로 미국 서버 업체에 호스팅 비용을 지불하고 운영하기 때문에 국내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미국 연방법엔 리벤지 포르노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에 현지에선 불법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에 직접 법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정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아예 나선 거죠. 대만, 일본과도 진행 중입니다.” 6월부터 한사성은 미국 내 비영리단체와 연대해 보복성 성적 영상물 처벌 법안 입법운동을 진행한다. 국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셈.
법이라도 촘촘하면 좋으련만, 갈 길은 멀다. 현행법상 이미 유포된 콘텐츠를 내려 받아서 재유포 한 사람은 ‘성범죄자’의 범주에 들어가지 조차 않는다. “ 피해 촬영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유포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히 ‘가해의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허술한 법망이 방치되는 사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헤비업로더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성들의 이 폭발적인 분노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피부 위에 꽂히는 실체적인 불안이죠. 이 땅에서 나는 안전할 수 없구나. 지하철에서,공중화장실에서, 심지어는 사랑을 나누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구나."
의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국가마저 ‘없다’는 깨달음이 더해지면서 절망하는 거예요.우리 모두가 이미 이 지독한 불안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고요.”
“세상을 바뀌는 건 결국 평범한 다수가 움직일 때죠.” 과연 이들의 말대로 세상은 뒤집히고 있는 중일까. 이들의 SNS 계정엔 이런 해시태그가 등장한다.
#불법촬영_피해자와_연대한다 #나는#너였다
기획, 제작, 사진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연합뉴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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