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촌 이내 성인ㆍ성녀ㆍ복자가 6명
평생 천주교와 얽힌 다산
정조가 홍수로 시 짓게 하자
다산 ‘나아방주의 일’ 인용
왕이 “어느 책에 나오느냐” 묻자
“전하와 읽은 책서 보았나이다”
서양 과학기술서 전파 붐 타고
사대부 의식 저층으로 스며들어
전무후무한 순교자 성인 집안
다산에게 서학(西學), 즉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천주교 신앙 문제가 다산의 발목을 낚아챘다. 정조의 눈 먼 사랑과 두둔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과 확산,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의 과정에서 다산은 늘 한복판에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李檗)은 큰 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형 정약종은 평신도 대표로 있으면서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천주교 교리서까지 썼다. 그의 아내 유조이 체칠리아와 딸 정정혜, 아들 정하상은 모두 순교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인품에 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큰 아들 정철상은 복자(福者)가 되었다. 큰 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는, 무력으로 쳐들어와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탄원으로 온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황사영의 아내였다. 조상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거부해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윤지충은 다산과 이종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다산 형제였다. 정약종과 윤지충 또한 2014년 복자품에 올랐다.
다산과 친가나 외가로 4촌 이내의 범위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인과 성녀가 셋, 복자가 셋씩이나 배출되었다. 순교자 수는 훨씬 더 많다. 사우(師友)를 포함해 다산과 관련된 순교자의 명단은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의 핵심그룹 그 자체였고 또 전체였다. 그의 집안은 세계 가톨릭 역사에서 앞에도 없었고 뒤로도 나올 수 없는 성인과 순교자의 가문이었다.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은 천주교에 관한 한 어떻게 하더라도 헤어날 수 없게 깊이 얽혀 있었다. 그는 이승훈에게 자청하여 영세를 받아 ‘약망(若望)’, 즉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한때 과거시험 공부도 팽개친 채 여럿이 모여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명례방의 종교 집회에 참석해 적발된 일도 있었다. 자식들이 천주학에 깊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안 아버지 정재원이 곁에 두고 철통 감시까지 했어도 다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정조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배교(背敎)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마음속에서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배교한 뒤 만년에 다시 참회해 신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는지 여부는 의견이 엇갈린다. 천주교 쪽의 가장 신뢰할만한 문서인 다블뤼(Antoine Daveluyㆍ1818-1866) 주교의 비망기에는, 다산이 만년에 참회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비망기에서 초기 가톨릭의 조선 전래에 관한 기술은 너무 간략하나 매우 정확하고 잘 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대부분 힘입었다고 분명히 썼다. 다블뤼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할 때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렀던 조선통이었다. 그는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말을 잘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비망기는 때로 전문(傳聞) 과정에서 다소의 과장이나 부정확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었을망정 거짓으로 꾸며서 쓴 기록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정작 다산 자신의 글 속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안 나타난다.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거나 외면하는 자기 검열을 거쳤다. 그간 이 문제에 관한 한 국학연구자와 천주교계의 논의는 얼음과 숯처럼 갈라져서 중간 지대가 전혀 없다.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만 보려는 통에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다산의 신앙과 배교도 사실이고, 만년의 참회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산의 경학 연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지고 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도 아니면 모, 전부냐 전무냐로 갈라 말해서는 안 될 문제다. 천주학과 유학의 공존, 이 가운데 다산을 배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인으로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경학 연구 사이에 특별한 모순 관계가 없다는 가설이 대전제다. 이렇게 보면 다산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율배반의 인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전신으로 받아들여 치열하게 진실을 살다간 영혼이 된다. 실상은 뭔가? 다산은 어떻게 천주교에 발을 들여 놓았고, 중간의 과정은 어떠했나? 아니 그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주학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부터 여러 회에 걸쳐 이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겠다.
의식의 기층으로 스며든 천주학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중국으로 떠난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을 갈 때마다 천주당에 들러 선교사와 필담을 나누고, 그들이 주는 각종 선물을 받아왔다. 1764년 홍대용은 북경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처음 보고, 음악에 대한 자신의 깊은 조예로 직접 건반을 눌러 보았다. 천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을 기대하고 신부와 면담을 요청했지만, 언어의 장벽 말고도 두 사람 사이에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수준 차가 너무도 현격해서 심도 있는 대화는 애초에 진행될 수가 없었다. 관상감 옥상에 각종 천문관측 기구가 놓인 관상대는 조선 사신 일행이 꼭 가고 싶어 하는 장소의 하나였다.
과학기술과 역법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해지면서 관심은 점차 그 배경 사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나 빤토하의 ‘칠극(七克)’ 같은 책은 진작부터 조선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었다.
기중가(起重架)를 제작할 때 정조는 서양인이 쓴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다산에게 내주어 참고하게 했다. ‘직방외기(職方外紀)’ 같은 지리서와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같은 세계 지도는 세상이 얼마나 넓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깨우쳐 주었다. 한문 서양서를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식견을 공유하는 것은 탐구욕에 불타던 조선의 지식 청년들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국이 진작에 공인한 천주교를 조선이 굳이 배격할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유학과 천주교는 상호 보완의 관계이지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실제 조선 지식인들이 구해 읽어 본 ‘천주실의’나 ‘칠극’, 그리고 스콜라 철학의 사유를 담은 ‘영언여작(靈言蠡勺)’ 같은 책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놀라운 통찰과 깊은 사유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갈리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으냐 다르냐로 나뉘어 100년 넘게 사생결단하고 싸우던 지식계의 풍경 안에 속해 있다가, 이들 글을 읽자 그들은 홀연 답답함이 뻥 뚫리고, 새로운 세상의 한 축이 열리는 느낌을 가졌다. 이렇듯 천주학은 서양 과학기술서의 전파 붐을 타고 조금씩 알게 모르게 사대부의 의식 저층으로 스며들었다.
답안에 쓴 노아의 방주 이야기
이능화가 1925년에 펴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의 제 18장은 제목이 ‘정씨형제삼인(丁氏兄弟三人)’이다. 그 중 다산이 탄핵 받은 일을 다룬 ‘정약용피핵(丁若鏞被劾)’조에 묘한 기사가 있다.
정조가 다산과 이학규에게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켰다. 책이 완성되어 올라갔다. 임금이 보니 ‘부(父)’자의 풀이에 ‘시생기(始生己)’란 말이 나왔다. 시생기란 처음 나를 낳아준 분이란 뜻이다. 정조가 불쑥 물었다. “이 뜻풀이는 어느 책에 나오는 것이냐?” 천주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처음 나를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교리서의 설명 중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이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규장전운’을 훼판(毁板)해야 한다는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애써 무시했다.
한 번은 홍수를 제목으로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다산이 올린 응제시(應製詩) 중에 놀랍게도 ‘나아방주(挪亞方舟)’의 일, 즉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방주의 일은 어느 책에 나오느냐?” 다산이 대답했다. “신이 전하를 모시고 그 책을 읽을 적에 이 뜻을 보았나이다.(臣於侍讀之其書, 得見此義.)” ‘시생기’와 노아의 방주 일은 모두 천주교 책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정조 또한 그 책을 다산과 함께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월북한 최익한이 1955년에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도 소개 되었다. 여기서는 노아의 방주를 ‘나닉(那搦)의 상주(箱舟)’로 적었다. 이능화와 최익한 두 사람 모두 인용의 명확한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당시 천주교 서적에서 노아는 ‘낙액(諾厄)’ 즉 ‘노에’로 표기하였으니, 근거가 된 원전 자료의 확인 문제가 남는다. 혹 당시까지 다산 집안에 분명히 있었던 ‘균암만필’ 속의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단정키 어렵다.
최익한은 이 일화를 소개한 뒤 한 발짝 더 나아가 “당시 반대당의 공세가 없었다면 서서(西書) 연구와 서교 신앙은 큰 문제로 되지 않고 오히려 자유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는 “가령 당시에 벽파 서인이 영구히 집권하고 또 왕위 계승자가 정조의 혈통이 아니었다면 정조 자신도 사학(邪學)을 비호한 연좌율을 죽은 뒤에 어떤 형식으로도 받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그 혜안이 자못 놀랍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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