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낸 것은 예상을 뒤엎는 한 방이었다. 놀란 김정은이 단번에 몸을 낮추고 문재인 대통령과 2차 판문점 정상회담을 열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더니 지난 주말에는 북한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웃는 얼굴로 기념촬영을 하고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배웅하는 모습을 보인다. 협상 상대방을 흔들고 달래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다.
김정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미 고모부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을 처형해 공포정치를 휘두르고, 핵 무력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완성을 선언하며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거래에 나서지 않았는가. 김정은은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즉흥적이며 거칠지만, 두뇌와 논리가 있는 편이라는 게 최근 책을 낸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의 증언이다.(‘3층 서기실의 암호’)
두 스트롱맨 사이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한 얘기를 접한 건, ‘1박 4일’ 살인적 일정으로 워싱턴에서 트럼프를 대면하고 돌아와 여독도 채 안 풀린 때였고,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행사 후 7시간도 안 됐을 때다. 미국 측에서 사전통보는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주미대사관에 통보가 왔을 무렵엔 이미 TV뉴스로 보도되고 있었으니까.
보수진영에선 기다렸다는 듯 ‘성실한 중재자’ 역할의 실패 아닌지 의심하고 ‘김정은의 위장평화쇼에 들러리를 선 것’이라고 냉소한다. 국회에서 판문점선언 지지 결의안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그런 정서를 대표한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문 대통령을 구해주기 위한 김정은의 배려”라고 비웃고, 한 야당의원은 “김정은이 여당 최대의 선대본부장”이라 비유한다. 이런 냉소가 나오는 건 북한이 그동안 우리 정부의 선의를 핵 개발 시간 벌기로 활용해온 역사 때문일 것이다. 미국 조야에서도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이행할 리 없다는 회의론이 적지 않다. 김정은 체제는 문재인식 ‘선의’보다는 트럼프식 ‘쥐락펴락’ 전략이 더 먹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대화국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나? 보수진영 주장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영철과 트럼프가 악수하는 마당에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이 남한 땅을 밟는다’고 통일대교 앞에 드러누워 철야 농성하는 현실 인식으로는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미국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도 김정은과 대화하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만 “북핵 폐기 없이 대화는 없다”는 과거 프레임을 고집할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 봉축사에서 빈자일등(貧者一燈)을 언급했다. 비록 지금 가진 게 없어도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교훈의 불교 버전이다. 인도 북쪽 슈라바스티에 부처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온 나라 사람들이 등불을 밝혔다. 부처를 꼭 보고 싶었던 가난한 여성 난타도 하루 종일 구걸한 돈으로 겨우 등불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들 등은 꺼졌지만 난타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제자 아난다가 그 등불을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자 부처는 이렇게 얘기한다. “아난다야, 등불을 끄지 마라. 사해의 바닷물을 길어다 붓고 태풍이 몰아친다 해도 저 등불은 끌 수 없다. 저 등불을 바친 이는 자신의 재산과 마음을 진실하게 바쳤기 때문이다.”(문재인, ‘대한민국이 묻는다’)
비핵화 협상 여정에는 상황을 초기화시킬 수 있는 ‘악마의 디테일’이 곳곳에 숨어 있다고들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됐지만 8일 남은 북미 정상회담까지 또 다른 반전이 없으리란 법도 없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대안 없이 폄하만 하고, 어디 잘 하나 두고 보자는 냉소적 태도가 정답은 아닐 터다. 우리 내부가 갈라진 채 핵을 가진 김정은과 타고난 도박사 트럼프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다른 것도 아닌, 안보 문제다. 진영을 넘어 저마다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등을 하나씩 켜자고 권하고 싶다.
김영화 정치부장 yaa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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