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복서로 활약하던 중학교 친구는 잘 싸우고도 자주 졌다. 유난히 치열했던 한 경기에서 버팅으로 입은 상처가 흉터로 남았는데 그 흉터가 자주 동티가 났다. 링사이드 닥터가 눈두덩에 난 상처를 그 자리에서 꿰매주면 대전료를 받아 코치와 반씩 나누고 얼마 안 되는 남은 돈으로 소주를 마셨다. 나는 아쉬운 결과를 곱씹으며 몹시 분을 낸 반면 친구는 다음 경기에서의 승리를 다짐하며 정작 후련한 표정을 짓곤 했다.
30년쯤 세월이 지나 그 친구의 표정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덴마크 사진작가 니콜라이 리나레스(Nikolai Linares)가 아마추어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패배해 2등이 된 권투선수들을 찍어 ‘The Second Best’라는 시리즈를 냈는데, 하나같이 그 때 내 친구의 표정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고 온몸이 녹초가 되도록 버틴 것을 주목한 작가는 “우리는 최고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최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단 하나뿐인 최고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어도 2등의 가치를 카메라에 담아낸 작가도 훌륭하지만 여전히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자청해서 2등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도 있다. 나를 뛰어넘는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있는 의사결정이 바로 기업간의 투자이고 M&A다. M&A나 투자는 상대 기업의 숨어있는 가치를 찾아내 자기 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한 새 동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서 상대 기업의 무형적 가치, 즉 DNA 확보가 핵심이다.
영리하게도 요즘 IT공룡들은 스타트업 기업에 큰 자본을 투자하고도 경영권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이 오히려 본질 가치를 유지하고 시너지를 크게 내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나란히 글로벌 카셰어링 기업인 디디추싱, 리프트에 경영권도 없는 지분 투자에 나섰지만 업계에서는 이 두 회사가 승차공유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카카오에 700여억원을 투자하고도 2대 주주 자리에 만족했던 텐센트는 YG엔터테인먼트의 3대 주주이기도 한데 새 트렌드를 벤치마킹하고 한류 콘텐츠를 확보해 중국에서 최적화하고 실행에 옮긴다. 카카오의 주가가 올라 투자 후 불과 3년만에 10배의 수익을 올린 것은 덤이다. 다시 이 텐센트의 최대주주는 지분 31.2%를 보유 중인 남아공의 언론재벌 네스퍼스다. 중국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뒤에서 조용히 투자기업을 키우는 중국답지 않은 행보가 눈에 띄는 네스퍼스같은 기업들이 생각보다 많다.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성을 존중하는 ‘2대 주주 전략’은 투자를 하든 받든 양방향 모두 유효하다. 유통을 강화해 물건을 더 파는 이야기를 넘어서 시장 전체를 놓고 큰 그림을 그리는 진정한 투자의 귀재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 경영자대상을 받은 우리나라 한 명품백 제조사 창업자는 해외 명품브랜드와의 제휴를 불과 20분만에 마무리한 사례를 전한다. 서로 장점이 있는 마케팅과 제조를 나눠 ‘서로 잘 하는 것을 하자’(Let’s do what we do well each other)’는 원칙에 의기투합하면서 첫 협상에서 합의가 어려운 조건들을 바로 받아들인 것이 주효했다. 상대방을 치켜세우고 2등 자리를 마다하지 않은 태도가 성공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탁월한 사람들은 때로 자신을 낮게 평가하곤 하는데 이것을 겸손보다는 예전보다 현실적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막연한 긍정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끔 우스운 결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절제다. 절제는 비겁과 무모 사이의 중용이고, 조용히 이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2등을 마다하지 않는 조용한 결단이 결국 이기는 사람들의 비밀이다.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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