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추한 명예를 회복하기란, 개인이든 집단이든 무척 어렵다. 사회계약으로 성립된 국가와 공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시민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공권력은 국가로서나 시민으로서나 불행한 일이다. 한국의 공권력, 특히 경찰이 지금도 그다지 시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어떤 이들이 지금도 국부(國父)라고 떠받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그 태생부터 망쳐놓았다는 점에서, 얼마간은 억울한 면이 있다. 물론 36년 식민지 역사와 독립의 정황, 분단과 냉전이라는,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와 정의의 기준은 냉전의 강력한 자장 속에 빨려들었다. ‘아이히만 체포’ 뒷얘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과 서독 정부는 나치 비밀경찰 등 히틀러 잔당들을 대거 동독ㆍ소비에트 견제의 주역으로 중용했다. 과거의 인권유린과 전쟁범죄 책임을 묻는 일보다 당장의 적색 공포에 맞서는 일이 더 시급했고, 거기 동원할 자원으로 나치 잔당만큼 경험과 기술을 갖춘 이들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권력에 맹종하는 수족으로서의 쓰임새를 입증해온 이들이었다.
한국의 경우 ‘노덕술(1899.6.1~1968.4.1)’이 그런 존재였다. 21세이던 1920년 순사교습소를 졸업해 경찰이 된 그는 치안ㆍ보안 업무에서 출세의 집념과 기량을 고루 갖춘 조선인 경찰관으로 고속 승진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 단체 및 ‘불령선인’들을 체포ㆍ고문했다. 24년 경부보, 43년 경시, 44년 수송보안과장으로 전시 보급업무까지 담당하는 동안 그는 ‘친일 고문경찰’의 상징적 존재로 악명을 떨쳤다. 해방 무렵 평양 경찰서장이던 그는 잠깐 구금됐다가 풀려나 월남,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에 의해 발탁돼 본청 수사과장으로, 경기도경 보안주임으로, 반민특위 파동 이후에는 헌병 중령으로 변신해 이른바 ‘빨갱이’사냥에 앞장섰다. 이승만으로서는 권력과 치안 유지에 친일파만 한 집단이 없었고,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노덕술을 거의 강압적으로 빼내 중용했다.
장택상이 노덕술을 불렀듯이, 그런 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면 자기 안위를 위해 비슷한 무리를 수하에 두기 마련이다. 그렇게 경찰 내 친일 인맥이 형성됐고, 굴종과 출세의 전통이 조직문화에 스몄을 것이다. 그 전통이 극복됐거나 되려 한다는 징후는, 적어도 조직 상층부에선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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