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 앞에 사는 남자’ 연주해주세요.”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스튜디오 홀로코인. 비디오테이프 공장을 개조한 이 창작 공간에서 한 여성이 건반 앞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신청곡을 요청했다. 관객이 건반에 연결된 헤드폰을 쓰니 연주자의 즉흥 공연이 시작됐다.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 연주, ‘1인 주크박스’다. 실험의 주인공은 재즈 피아니스트 윤석철(33). 가수 자이언티와 화가 김이수 등이 함께 쓰는 스튜디오의 창작자들이 꾸린 벼룩시장에서 윤석철은 피아노 연주를 ‘상품’으로 내놨다. 관객만 있다면 모든 곳이 무대다. 윤석철은 연주뿐 아니라 관객과 서로의 고민까지 공유했다. 행위 예술 체험료는 15분에 3만원. 18일까지 이틀 동안 16명이 1인 주크박스를 이용했다. 수익금은 모두 자선단체에 전해진다.
무명이라서 할 수 있는 파격이 아니다. 윤석철은 대중 음악계에서 소위 잘 나가는 프로듀서다. 지난 겨울 자이언티가 부른 ‘눈’을 비롯해 샘 김의 ‘노 눈치’ 등 인기 가수들의 노래 작곡ㆍ편곡자 이름엔 윤석철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갓 스무 살이 되던 해인 2005년, 울산재즈페스티벌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 그는 재즈와 대중 음악의 경계를 쉼 없이 지운다. 그의 음악적 화두는 정통보다 융합이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를 찾은 윤석철은 “대중음악인들과의 교류가 내 음악적 색을 더 채운다”고 말했다. 대중음악에 다리를 걸친 재즈 피아니스트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싸늘한 시선에도 그가 다양성으로 변화를 추구한 이유다. 윤석철은 요즘도 자이언티,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백예린과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 윤석철트리오를 결성해 한국 재즈의 기대주로 불린 윤석철은 인디 밴드 안녕의 온도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윤석철의 자유분방함은 그의 신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윤석철트리오는 최근 낸 새 앨범 ‘4월의 D플랫’에 봄캐럴(‘산타클로스 이즈 커밍 투 타운’)을,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활용해 ‘새벽의 연습실’이란 곡을 실었다. ‘새벽의 연습실’은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작은 연습실에서 곡을 쓰고, 관객이 한 명도 없는 클럽에서 연주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며 쓴 곡이기도 하다.
그의 악상은 늘 현실과 맞닿아 있다. ‘4월의 D플랫’ 뮤직비디오 후반, 한 여성은 비와 눈이 휩쓸고 간 숲에 핀 노란 꽃을 발견한다. 이때 곡의 멜로디는 D키에서 이 보다 밝은 분위기의 F키로 바뀐다. 시련과 노란 꽃 그리고 4월... ‘4월의 D플랫’은 세월호 참사로 아픈 달이 된 4월의 추모곡 같다. 윤석철은 “새로운 희망을 위해 쓴 곡”이라고 했다.
윤석철은 내달 16일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4월의 D플랫’ 발매 기념 공연을 연다. 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을 만들고 있다”고 웃으며 신곡 얘기도 귀띔했다. 다음달 초엔 홍익대 인근에서 길거리 공연도 할 계획이다. 윤석철은 또 어떤 곳에서 럭비공처럼 튀어 나올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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