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했던 77일]
회담 성사도 취소도 전광석화
트럼프 스타일 그대로 보여줘
남북 ‘판문점선언’ 채택 후
대화 성공 분위기도 잠시
최선희 막말 담화가 결정타
‘세기의 담판’으로 기대를 모았던 6ㆍ12 북미 정상회담은 성사도, 또 취소도 전광석화였다. 3월8일 한국 특사단이 전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제의 메시지에서 시작된, 전례 없던 파격적 대실험은 5월23일 밤 백악관에 도착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대미 비난 성명으로 무너졌다. 두 메시지의 수신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유의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즉각적인 결정이었다.
스스로 최고의 협상가를 자부한 트럼프 대통령은 파격적 결단으로 전임 대통령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북핵 문제의 고리를 단번에 끊을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오랜 기간 핵개발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강고한 체제 생존 본능의 벽을 뚫는데 실패했다. 이는 결국 최단기간 비핵화를 원한 트럼프 대통령과 단계적이고 점진적 해법을 요구한 김 위원장 간의 비핵화 방식의 이해 차가 요원하다는 뜻이어서 향후 회담 재개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소다.
3월8일 백악관을 찾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 제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망설임 없이 즉각 결정을 내렸다. ‘오케이’라며. 참모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그는 백악관 기자실을 찾아 “한국 대표단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다”라고 예고편을 띄웠다.
이렇게 시작된 북미 정상회담 준비 작업은 곧바로 북한에 대한 오랜 불신으로 가득한 워싱턴 정가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렇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달 10일 유세장에서 “북한이 화해를 원한다. 이제 때가 됐다”며 “전 세계를 위해 가장 위대한 타결을 볼지 모른다”고 흥분했다. 과거 수차례 비핵화 약속을 어겼던 북한과의 위험한 회담이었지만, 성공시 역사적 타결이란 커다란 배당에 승부를 건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안보라인 재편에 나섰다. 3월13일 엇박자를 빚었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전격 해임하고 핵심 측근인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그 자리에 앉혀 회담 성사의 전권을 맡겼다. 하지만 안보라인 개편과 국무부의 한반도 라인 공백 등으로 북한과의 실무 협의 진전 소식은 없어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비관론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특히 3월26일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1차 방중으로 경계심이 커졌으나, 4월 들어서는 백악관 참모들 사이에서도 낙관론이 조금씩 확산됐다.
폼페이오 장관이 4월1일 비밀리 방북, 김 위원장을 만난 게 결정적 계기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달려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앞에서 “남북이 하는 종전 논의를 축복한다”며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도 띄웠다. 북미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의 빅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비핵화 문구가 담긴 ‘판문점 선언’이 채택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폭적 축복과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노벨상”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매우 개방적이고 훌륭하다(honorable)”고 칭한 것도 이 때였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은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북미간 직접 대화 국면으로 바뀌면서 이상 신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30일 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거론하며 고무된 모습을 보였지만, 같은 날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선 비핵화-후 보상’의 리비아 모델을 처음 거론하며 빠른 비핵화 압박에 나섰다. 김 위원장이 1차 방중에서 제시한 ‘단계적ㆍ동시적 조치’의 비핵화 해법과 선명하게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영구적 비핵화(PVID) 등 미국의 요구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5월7일 2차 방중에 나서 ‘단계적 동시적 조치’를 재차 강조했다. 이틀 뒤 폼페이오 장관이 2차 평양 행에 나서며 북ㆍ미ㆍ중의 움직임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폼페이오 장관이 억류 미국인 3명을 데리고 나오면서 북미간 비핵화 방식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이뤄진 듯 보였으나, 결국 협상의 세부사항이 논의될수록 대립이 첨예해졌다.
폼페이오 장관은 2차 방북 이후 ‘한국만큼의 번영’을 거론하며 대규모 경제 지원이란 당근을 제시했지만, 볼턴 보좌관은 13일 재차 리비아 모델을 거론하며 핵반출 장소로 테네시주 오크리지를 특정했다. 북한에 패전국 수준의 굴복을 강요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대미 비난 성명(16일)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북한은 이때부터 미국과의 연락을 끊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튿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리비아 모델이 전혀 아니다”며 한발 물러서고 문재인 대통령도 22일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간 갈등 봉합에 나섰다. 하지만 23일 최선희 부상의 두 번째 대미 비난 성명이 나오면서 비핵화 방식을 둘러싼 북미간 힘겨루기는 정상회담 무산으로 막을 내렸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