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핵합의 재협상 없다”
12개 요구사항 공개
중동 친이란 세력 분쇄 예고
이란 관계자 “미국, 정권교체 원해”
유럽 합의 존속 노력도 위기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이른바 이란 핵 합의 파기 이후 강력한 압박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이란 정책을 공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란 핵 합의를 재협상하지 않겠다며, 시리아에서 이란 병력의 완전 철수를 포함한 새로운 12가지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21일(현지시간) 미국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 연설을 통해 기존의 이란 핵 합의를 대체하는 새 이란 정책을 발표하며 “2015년 이란 핵 합의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란과 러시아ㆍ중국이 원하는 기존 핵 합의 고수는 물론, 유럽연합(EU)과 영국ㆍ프랑스ㆍ독일 등이 추진 중인 기존 이란 핵 합의의 재협상 가능성마저 원천 배제한 것이다.
우선 폼페이오 장관은 이란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우라늄 농축 중단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재처리 중단 ▦탄도미사일 개발 중단 ▦이란 내 군사시설을 포함한 시설에 무제한 접근 허용 ▦과거 핵무기 개발 계획 전면 공개 등을 요구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어 이란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중동 내 타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국방부와 협력해 이란의 공격적 움직임을 차단할 것”이라며 “이란의 전쟁을 대리하는 세력(proxy)은 분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요구사항으로는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 지원 중단 ▦시리아에서 이란 병력 전면 철수 ▦이라크 정치 개입 중단 ▦미국이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지원 중단 ▦이스라엘을 향한 위협 중지 등을 꼽았다.
폼페이오 장관은 여기에 추가로 ▦이란 내 미국인의 즉각 석방 ▦이란 국민의 인권 침해 중단도 요구했다. 그는 “이란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경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전례 없는 금융 압력”을 예고했다.
물론 폼페이오 장관은 이란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의 ‘당근’도 제시했다. 경제제재를 전면 중단하고 외교ㆍ교역관계를 회복하며 선진 기술 전수와 이란 경제 현대화, 국제 금융체제로의 재합류 등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상기하며 “미국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폼페이오 장관의 12개 요구 사항은 이미 기존의 이란 핵 합의에 대한 재협상도 거부하는 이란 입장을 감안하면 수용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실제로 이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폼페이오 장관의 발표에 대한 입장을 요청한 로이터통신에 “폼페이오의 발언은 미국이 이란의 레짐체인지(정권교체)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기존 이란 핵 합의의 수정을 통한 유지를 추구하는 영국ㆍ프랑스ㆍ독일과 EU의 반응도 긍정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들 서유럽과 한국을 포함한 다른 동맹국에도 이란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겠다며 각국에 미국의 새 전략을 설명할 목적으로 전문가 팀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이란과 금지된 사업을 하는 유럽 기업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EU와 서유럽 3국은 1996년 쿠바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도입했으나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던 ‘제재 우회’ 조항까지 적용해 이란과 사업을 진행하는 유럽 기업을 보호하고 핵 합의를 살리겠다는 입장이지만, 폼페이오 장관의 연설을 통해 드러난 트럼프 정부의 입장이 핵 합의 존속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어서 이런 시도가 무색해졌다. 이미 프랑스 석유기업 토탈과 독일 금융기업 알리안츠, 전자기업 지멘스 등은 이란과의 사업 계획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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