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 6대 사무총장 이종욱이 2006년 5월 22일 별세했다. 192개 회원국 연례총회(World Health Assembly)를 시작하던 날이었다. 오전부터 이어진 심한 두통을 진통제로 달래던 그는 점심식사 후 구토 증세를 보여 제네바의 한 병원으로 호송돼 긴급 경막하 출혈과 혈전 제거수술을 받았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향년 61세. 조류독감 사스가 기승을 부려 WHO가 동분서주하던 때였고, 그는 의학적 확증 없이 치료제 타미플루(Tamiflu)의 재고를 확보하라고 각국에 독려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혈압이 높은 편이긴 했지만 대체로 건강했다고 한다.
이종욱은 의료 행정가라기보다는 국제 의료봉사 활동가라는 직함이 훨씬 어울렸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성형외과를 전공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마다하고 수련의 과정을 포기한 채 하와이대 보건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의료봉사의 뜻이 확고해서였겠지만 학부시절 한 나환자시설에서 봉사활동 중 만나 79년 결혼한 동갑내기 일본인 부인(가라부키 레이코)의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열대전염병을 전공한 이종욱은 그 무렵 WHO로 자리를 옮긴 한 교수의 권유로 83년 남태평양 피지의 한센병 관리팀에 합류한다. 그는 94년 제네바 본부의 예방백신사업국장이 될 때까지, 필리핀 사무소장과 서태평양사무처 질병관리국장 등 현장 활동에 주력했고, 빈곤국 결핵과 소아마비 등 전염성 질병 예방 및 퇴치에 헌신해 ‘백신의 황제’라 불리기도 했다.
이종욱은 한국과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2003년 WHO 사무총장이 됐다. 이사회 선거 막판에 미 하원의원 53명이 그를 지원하도록 당시 국무장관과 보건장관에게 편지를 쓴 일화가 있다. 재임 중 업적은 평가가 엇갈린다. 미국의 입김을 차단하는 데 미진했고, 과도한 목표(‘3 by 5’, AIDS 치료제를 2005년까지 300만명에게 보급하기)를 설정했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의료저널 ‘The Lancet’은 그가 비대한 본부 예산 및 인력을 지역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관료화한 WHO의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WHO 사무총장이 되면서 29만km를 탄 낡은 볼보를 폐차한 그는 “환경을 위해” 하이브리드 승용차인 도요타 프리우스를 관용차로 선택했고, 숨질 때까지 제네바 외곽의 작은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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