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계리 폐기 행사 중지 가능성
16일 남북 고위급회담도 취소
NPT 탈퇴 이후 제네바합의 등
北, 국제사회 약속 번번이 어겨
6자회담 합의도 1년 만에 파기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까지
‘최고존엄ㆍ체제 비판’ 이유
협상 우위 점하려는 의도도
북한이 18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23~25일)에 참가할 예정이던 남측 취재진 명단 수령을 거부했다. 통일부는 이날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취재할 우리 측 기자단 명단을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 공지하려 했으나 북측은 통지문을 접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로써 북한의 일방적 합의 번복이 반복될 가능성이 커졌다. 16일에도 북한은 4ㆍ27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고위급회담을 중지한다고 회담 당일 돌연 우리 정부에 통보한 바 있다.
판문점 선언 이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치가 높아졌으나, 늘 한쪽에서는 북한을 신뢰하는데 대한 회의론이 존재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되풀이된 북한의 합의 파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 있는 전직 정부 당국자는 “돌아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냉각탑을 폭파했을 때, 그때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정말 있었는지 아직도 확신이 안 선다”라고 털어놨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도 3월 남북 사이에 특사가 오간 희망적인 상황에서도 “20여년이 넘는 북한과의 협상 역사에서 북한은 항상 합의를 파기해 왔다”며 “우리(미국)는 북한과의 대화에 열린 마음이지만, 북한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1955년 핵물리연구소를 창설했다고 알려진 북한은 이듬해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고, 본격적으로 소련의 핵 과학자들로부터 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985년 NPT 가입을 조건으로 소련은 북한에 440㎿(메가와트)급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경제ㆍ기술 협력협정’을 맺었고, 북한은 같은 해 NPT에 가입했다. 전세계 핵 군축 분위기와 맞물려 1991년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고, 이듬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기구 협정에도 서명했다.
1992년 IAEA는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90g)이 예상치보다 적어 핵 물질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NPT 탈퇴를 선언했다. 국제 합의 번복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1994년 북핵 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 중유 공급 등을 맞바꾸는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며 NPT 탈퇴를 철회, 북핵 위기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2002년 제네바 합의 사문화 및 1차 핵실험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북한은 파키스탄에서 P-2형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기술을 전수(傳受)하는 등 핵 관련 활동을 지속했다. 2002년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을 생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북한이 이를 인정한다는 의미의 답변을 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다. 북한은 같은 해 IAEA 사찰단을 추방하기도 했다. 미국이 북한에 중유 공급을 중단했고, 이에 북한은 2003년 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2003년 한ㆍ미ㆍ중ㆍ일ㆍ러가 공동으로 북한과 비핵화 문제를 협의하는 6자회담이 시작됐다. 4차례 회의 끝에 2005년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보상으로 안전 보장과 중유, 경수로 등 대북 지원을 받기로 하는 9ㆍ19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하지만 미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에 포함해 북한 자금을 동결하자 북한은 회담을 거부하고 이듬해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2007년 6자회담 후속 협의의 연속 파기
국제사회는 북한을 압박하는 한편 6자회담 틀에서 협상을 지속했다. 6자회담 참여국과 북한은 9ㆍ19 공동성명에 구체적인 이행 계획이 없다는 공감대에 따라 구체적인 로드맵을 담은 ‘2ㆍ13합의’와 ‘10ㆍ3합의’를 2007년 타결했다. 비핵화를 대가로 북한에 에너지 공급을 재개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듬해 북한은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며 이에 화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HEU 프로그램 신고 등 핵사찰에 동의하지 않았고, 2009년 장거리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데 이어 제2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김정은 정권에서도 2012년 2ㆍ29 북미 베이징 합의에서 식량 24만톤 등을 지원 받는 대가로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우라늄 농축 활동 중단을 약속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4월, 장거리로켓 ‘은하 3호’를 발사하며 합의를 파기했다. 당시 북한은 인공위성이 탑재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지난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 미국 본토까지 닿을 미사일 사거리 기술을 확보했고, 6차 핵실험으로 핵 무력 완성 선언까지 했다.
최고존엄 비판 이유로 회담ㆍ이산가족 상봉 파기
북한이 파기한 건 비핵화 합의뿐 아니다. 남북 회담에서도 북한의 합의 파기는 수시로 벌어졌다. 특히 최고존엄과 체제를 비판했다는 핑계로 예정된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경우가 잦았다. 2014년 11월, 탈북자 단체가 휴전선 근처에서 대북전단 약 100만 장을 살포하자 “우리의 최고존엄을 건드리는 자들은 그가 누구이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며 예정된 제2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열지 않았다.
2013년 9월에는 이산가족 상봉 이틀 전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내고 “우리와 끝까지 대결하려는 자들에게까지 선의와 아량을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상봉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고위 탈북자 간부를 인용해 “리설주 여사가 음란물 촬영에 관련돼 있다”는 보도를 냈고, 이를 국내 언론사가 받아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 따른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탈북자 발언 문제 삼아 회담 중지도
고위 탈북 인사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경우도 있었다. 북한은 지난 16일 남북 고위급회담을 취소하며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가 김정은 위원장의 외교를 ‘쇼맨십’으로 표현한 발언을 문제 삼는 듯한 성명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다. 1999년 7월 열린 남북 2차 차관급회담에서 북측 단장이었던 박영수 조평통 서기국부국장은 “(비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쟁 못한다는) 황장엽(전 노동당 비서)의 서해사건 인터뷰 내용은 북한체제를 모독한 것”이라며 현장에서 성명문을 낭독하고 회의를 중지시켰다. 2013년 8월에는 “(보수 단체가) 인공기를 소각하는 등 북한 체제를 모욕했다”며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5일 남기고 선수단 파견을 잠정 중단하기도 했다.
북한의 기습적인 회담 취소는 치밀한 계산에 의한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향후 협상에서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고, 갑작스런 합의의 취소와 연기 및 재개를 통해 주도권이 북한에 있음을 보이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바로 전날 기습 통보하는 등의 합의 취소를 통해 상대를 긴장시키고 협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게 북한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다음 달 12일이면 북미 정상회담이다. 북한이 벌인 역사상 최대의 도박판이다.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핵포기만 강요하는 대화에는 흥미 없고, 북미 정상회담에 응할지 재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도 북한이 합의를 번복하는 모험을 할까.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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