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찾은 울릉도 풍경에 반해
14년 전 낡은 농가를 고쳐 짓고
아트센터 세워 옛 동료와 공연
찾기 힘든 곳인데도 객석 꽉 차
지인이 오면 텃밭 상추로 대접
“좋아하는 일 하며 사는 게 행복”
‘제한구역서비스’. 지난 16일 오후 5시 휴대폰에 뜬 문구다. 설마 하고 전화를 걸어보니 역시 불통이다. 통신사의 통신 오류 때문이 아니다. 경북 울릉군 울릉읍 북면 평리2길. ‘세시봉’ 가수 이장희(71)의 집을 찾아 ‘울릉천국’이란 문구가 새겨진 큰 돌 왼쪽으로 난 비탈을 따라 올라가니 ‘천국’이 펼쳐졌다. 송곳산 아래 들판(1,652㎡)에선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자연 속에 살고 싶던 소년 꿈을 이루다
하늘로 우뚝 솟은 송곳봉과 석봉 아래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허름한 1층짜리 집 앞마당엔 봄 햇살을 머금은 연못이 빛나고 있었다. 이장희가 굴착기 사용법을 배워 직접 판 연못이었다. 초록의 울릉천국에서 탁 트인 하늘 아래 반짝이는 쪽빛 바다를 보니 낮은 탄성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네 시간, 경북 후포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두 시간 반, 울릉도 사동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동한 ‘고난의 행군’ 뒤 얻은 절경이었다.
“1996년 울릉도에 처음 왔어요. 배를 타고 도동항으로 들어오는데 양쪽에 절벽이 있었죠. 그 사이로 들어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것처럼 신비했다니까요.” 모자를 눌러 쓴 이장희가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 “웰컴 투 울릉도”라고 인사를 건네며 취재진에 들려준 얘기다.
이장희는 2004년부터 울릉도에서 살고 있다. 영화 ‘타잔’을 보며 거대한 자연 속 삶을 꿈꿨던 소년은 꿈을 이뤘다. 이장희는 바다 건너 회색 빌딩 숲에 사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발신지로 울릉도 대신 ‘울릉천국에서 이장희가’를 버릇처럼 썼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둥지를 울릉천국이라 불렀다. 그의 바람은 먼저 떠난 애견 ‘라코’(라디오코리아를 줄인 이름)가 떠난 이 곳에 함께 묻히는 일이다.
울릉도에서 40여 년 만에 밝힌 ‘동방의 빛’
이장희는 울릉천국에 무대도 세웠다. 이달 문을 연 ‘울릉천국 아트센터’다. 경북지사가 이장희에게 문화 센터 건립을 제의, 그가 흔쾌히 자신의 농지 일부(1,150㎡)를 내줘 들어선 공간이었다.
이장희는 지난 6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외진 곳에서의 공연은 입소문이 난 눈치다. 16일 공연장엔 150석이 꽉 찼다. 일부 관객은 서서 70여 분 동안 그의 노래를 들어야 했다. 공연 열기는 뜨거웠다. “마시자~”. 이장희가 노래 ‘한잔의 추억’을 부르자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잔의 추억”을 이어 불렀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의 히트곡 연주가 이어지자 관객들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소규모 공연이라고 얕봐선 안 된다. 1970년대 활동했던 록밴드 동방의 빛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베이스시스트 조원익이 무대에 올라 합주에 힘을 보탰다. ‘열 두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등 CF송을 만든 강근식과, 유재하의 유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제작한 조원익은 당대 손꼽히는 연주자들이었다.
경기 안양에서 울릉천국을 찾은 최원성(66)씨는 “새벽에 일어나 배 타고 고되게 왔는데 자연에서 이장희의 공연을 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남편인 최씨와 함께 공연을 본 임모(65)씨는 “유명했던 가수가 자연에 묻혀 산다기에 궁금했다”며 “옛 가수가 자연에서 기운을 받아 노래하고 우리한테 그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것 같아 행복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장희의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울릉천국엔 꾀꼬리 소리가 공연의 ‘2막’을 열었다. 이장희는 동방의 불빛과 오는 9월15일까지 매주 화, 목, 토요일 오후 5시에 공연한다. 첫 공연엔 후배 가수 이승철도 다녀갔다.
인공 지능 스피커와 동거
‘방랑 가객’은 2004년 미국에서 운영하던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 대표를 그만둔 뒤 “하와이에서” 제2의 삶을 살 예정이었다. 하지만 1996년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울릉도를 찾은 뒤 “홀딱 반해” 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울릉도엔 뾰족한 산봉우리들이 늘어서 있고 절벽 경관이 유독 많아 제주도와 비교하면 야생성이 더 강하다. 이장희는 당시 “열흘 동안 섬을 걸을 정도로” 섬의 풍경에 빠졌고, 농가를 사기 위해 농협까지 찾아가 현 부지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외양간 등이 붙어 있는 집을 3분의 1 정도 뜯어고쳐 거실과 방 2칸, 부엌과 욕실이 딸린 집으로 바꿨다. 더덕 농사는 3년 만에 포기했다. “허리가 아파서”였다. 요즘엔 텃밭에 상추 등을 기른다. 이장희와 조원익은 지인이 찾아오면 기르던 상추를 따 밥상에 내놓기도 한다. 강근식은 서울과 울릉도를 오가며 공연을 하지만, 이장희와 조원익은 울릉천국에 머물며 무대에 선다.
이장희는 아마존 ‘인공지능 비서(스피커)’인 ‘알렉사’와 함께 산다. 창문을 통해 본 그의 방 책상엔 미국 컴퓨터 제조사 애플의 맥북이 놓여 있었다. 지인들에게 이장희는 ‘얼리 어댑터’로 통한다. “한 번 해보지 뭐”라며 쉼 없이 부딪혀 온 노장은 외딴 섬에서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
“30여 년 넘게 음악을 잊고 살았어요. 음악이 내 전부이던 시절 음악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공연한 뒤 술 한 잔 기울이는 게 참 좋아요. 이제 저도 칠십이 넘었어요. 인생 마지막에 이렇게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요, 하하하.”
울릉도=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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