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스티븐 연은 스스로를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 칭했다. 욱일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 때나, 1차 사과문 게재 당시엔 자신의 정체성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2차 사과문을 통해 일부 팬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이번 논란이 짙은 아쉬움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스티븐 연은 한국에서 태어나 5세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 뒤 미국 국적을 얻었다. 현지에서 배우로 데뷔해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에 출연하며 전 세계적 유명세를 탔다. 한국에서의 인기도 뜨거웠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 출연했을 당시,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 ‘버닝’에도 캐스팅돼 유아인과 호흡을 맞췄다.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옥자' 기자회견에 참석한 스티븐 연은 "이 자리에 오게 된 게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자부심을 느낀다"며 "무엇보다 영화 '옥자'로 내가 태어난 나라에 돌아오게 돼 배우로 기쁘다. 제 영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나에겐 꿈이 실현된 순간이다"고 벅찬 감동을 표한 바 있다.
비록 국적은 미국이지만 스티븐 연의 뿌리는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이란 생각을 더욱 확고히 심어주는 발언이었다. 이후 많은 한국 영화인들이 스티븐 연과의 작업을 희망했다. 수많은 한국 팬들이 그의 행보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하지만 욱일기 논란에 휘말리자, 스티븐 연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은 잠시 잊고 '타국의 문화와 정서를 잘 몰라서 실수한 미국인'으로서만 행동했다. 반감을 가질 만한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사실보다도, 한글과 영어 사과문의 내용이 다른 것이 큰 충격을 안긴 부분이었다.
스티븐 연이 사과문을 공개한 뒤, 서경덕 교수는 "한국어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영어로 된 사과문에서는 '이번 일은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에서) 넘기기 한 번, 실수로 좋아요를 누른 것, 생각 없이 스크롤을 움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인터넷 상의 세상은 굉장히 취약하다. 우리를 표출하는데 이런 플랫폼을 쓰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고 했는데 이 같은 글은 자칫 '인터넷 상에서의 실수 한 번으로 사람을 재단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글을 올렸다는 것은 아직 제대로 된 반성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며 "자신도 정말 실수였다고, 이번 계기로 욱일기에 대한 뜻을 정확히 알았다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영어 사과문을 진심으로 올렸다면 이렇게까지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렇다. 강도 높은 반성이 담긴 2차 사과문을 처음 논란이 번지기 시작했을 때 올렸더라면 ‘실수’를 너그러이 이해해줬을지도 모른다. 즉각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랐다면 이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자, 모든 글을 삭제했던 스티븐 연은 13일 오후 자신의 SNS에 2차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는 해당글을 통해 "최근에 제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지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어린 시절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저의 무지함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저의 실수, 특히 어떤 방식으로든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되는 역사의 상징에 대한 부주의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깊게 영향을 미치는지 배우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이번 일이 제게는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 됐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을 약속 드린다"고 덧붙였다.
스티븐 연에게도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 됐다니, 한때 그를 응원한 사람으로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주변에서 부추겨서 억지로 한 게 아니라, 2차 사과문에는 꼭 스티븐 연의 진심이 담겼기를 바란다.
유수경 기자 uu8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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