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알던 이름들이 사라지고 잊혀지는 일이 많아진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던 사람들을 먼저 떠나 보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자연의 섭리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우고 생활인으로 자리 잡아가며 이런 저런 추억으로 연결된 기업들이 무너지거나 잊혀지는 모습에서는 아쉬움 못지않게 새로운 것도 깨닫게 된다. 얼마 전 ‘토이저러스’가 미국 내 모든 매장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베이비붐 시대에 장난감 사업으로 여러 나라에 1,800개의 매장을 거느리며 13조원의 매출을 자랑했지만 소비자들이 토이저러스 매장에서는 상품 구경만 하고 정작 주문은 아마존에서 하는 바람에 망했다. “우리의 혁신능력은 경쟁사에 비해 10년이나 뒤처졌다”는 경영진의 반성도 이미 너무 늦었다. 유통산업에 아마존이 있다면 온라인 세상엔 구글과 페이스북 두 거인의 시장독점이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성장이 가장 활발했던 1950년대에는 상위 60개 기업이 GDP의 2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20개사가 20%를 차지한다. 이들 대부분이 IT 업종이다.
최근 IT업계에서는 기존 시장을 교란시키면서 판을 새로 짜는 기업을 통틀어 디지털 침입자(Digital Invader)라 부른다. 한 부류는 구글과 아마존, 알리바바 등 기득권을 형성한 '디지털 자이언트(Digital Giant)'이며 다른 부류는 규모가 작지만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는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앵클 바이터(Ankle Biter)'다. 앵클 바이터는 특정 분야에서 기존 거인들조차 진입하기 어려울 만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업들이다. 이런 IT 기업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 전세계 유통업계가 주목하는 신세대가 있는데 바로 1990년 대 이후 중국에서 출생한 주링허우(九零後)다. 주링허우 세대는 집중은 잘 못하지만 속독에 익숙하다. 현대인이 하루 평균 100m 정도를 한다는 모바일 화면의 스크롤 때문이다. 또 베이비붐 세대 부모의 적극 지원으로 해외여행, 어학연수 등에도 활발하게 참여해 보고 듣는 것이 많다. 2014년 중국 항저우에서 설립된 신생 기업 앤트 파이낸셜의 기업 가치가 골드만삭스를 능가하게 된 것도 주링허우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4살짜리 ‘개미’가 150년 역사의 ‘금융공룡’을 꺾었다며 난리다. 앤트의 성공 비결은 백화점부터 노점상까지 보편화한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인 ‘알리페이’ 덕분이다. 노점에서 파는 군고구마도 휴대폰으로 QR코드를 스캔해 사 먹는다. 이를테면 앵클 바이터인 앤트 파이낸셜이 전혀 다른 게임의 룰을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 셈이다. 새로 부상하는 세력이 지배세력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위협해올 때 극심한 구조적 긴장이 발생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게 오늘의 현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엔 먹이사슬도 생태계도 질서 있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 질서와 위계가 걸림돌이라면 과감히 뛰어 넘을 뿐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선 신용카드 결제망이 너무 잘 갖춰진 것이 오히려 혁신의 걸림돌이라는 지적까지 나올까.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것은 강한 종이나 똑똑한 종들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라고 말했다. 통념과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승리하는 앵클 바이터들의 활약 뒤로 몸집이 너무 커서 약점이 된 골리앗들이 사라지고 잊혀져 간다. 사람이나 기업의 생애를 돌아보면 결국 실재했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부딪치며 적응해 간 치열한 스토리만 남는다. 베이비붐 세대가 주링허우 세대를 부양하며 토이저러스를 일으켰는데 바로 그 주링허우가 토이저러스 문을 닫고 지금과는 다른 딴 세상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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