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강국 미ㆍ소, 보복 두려워 전쟁 회피
두차례 핵감축도 '반공' 닉슨-레이건 주도
김정은 핵과 트럼프 힘, 평화협상 끌어내

살다보면 우리는 엉뚱한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와 역사에도 결과가 의도와 달리 엉뚱한 ‘역설의 정치’를 목도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냉전과 핵경쟁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이라는 첨예한 군사적 대립 상태를 40년 이상 유지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수천 번 부술 수 있는 엄청난 핵무기를 비축하며 핵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한 번도 직접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특히 미국 코앞에 위치한 쿠바가 소련의 미사일을 몰래 들여오면서 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었지만, 핵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양대 초강대국 간의 전쟁회피는 역설적으로 핵무기 덕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합의된 의견이다. 핵으로 적을 공격할 경우 적도 핵보복을 감행해 자기도 전멸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의 균형’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켜줬다는 이야기다. 핵의 엄청난 파괴력이 전쟁을 막아줬다니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미소가 두 차례 합의한 핵감축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공화당 내에서도 강성 반공주의자인 닉슨과 레이건 대통령이었으니, 이 역시 ‘역설의 정치’다.

역사적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 그리고 한 달 뒤에 열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을 기대하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역설의 정치다. 그동안 일부 진보진영은 북핵을 북한의 자위권 발동이라고 옹호했지만, 나는 어떠한 핵무기도 한반도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북의 핵개발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과는 별개로, 문재인-김정은의 남북 정상회담과 트럼프-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상징되는 한반도의 평화 국면, 구체적으로 한반도의 항구적인 전쟁상태 종식과 평화체제 논의를 가능케 만든 것은 촛불혁명에 의한 문재인 정부의 출범도 있지만, 동시에 북한의 핵무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동안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전선언으로 바꾸고 평화제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해 왔지만 미국은 이 같은 요구를 줄곧 무시해 왔다. 그러던 미국이 이제 북한 요구에 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지 않았다면 미국은 북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비판해온 북한 핵무기가 종전과 평화체제를 가능케 만들고 있으니 역설의 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뿐이 아니다. 미국 정치는 유럽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럽처럼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사실상 ‘보수 양당제’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버럴’하고 개방적인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비해 민주당의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북핵 문제에 대해 북미 정상회담과 평화체제 전환을 적극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수적인 공화당까지도 ‘진보적’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극우적’인 트럼프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수락하고 평화체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이 역시 또 다른 역설의 정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비핵화를 향한 김 위원장의 거침없는 광폭 행보는 역설적으로 그가 우리와 달리 야당이나 시민단체 등에 의해 크게 견제 받지 않는 강력한 권력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직 북한 핵무기의 해체와 평화체제로의 전환 등 한반도 평화 문제는 갈 길이 멀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판문점 선언은 그 역사적 의미가 엄청나지만 상징적 의미에 비해 구체적 내용은 취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성공적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서 ‘역설의 정치’가 완성되기를 기원해본다. 역설의 정치 만만세!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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