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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정조가 내린 800개 질문에 완벽하게 답한 다산

입력
2018.05.10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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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과녁 못 맞춘 핑계 삼아

한꺼번에 수백개 깊은 질문 받자

챕터별 정밀히 분류해 메모 정리

질문도 답변도 완벽 ‘군신간 일합’

책 읽다 떠오른 생각 습관적 메모

여백에 쓴 글 모아 책으로 엮기도

메모는 다산 학술의 거의 모든 것

규장전운의 시작부분. 여백의 빨간 글씨는 다산이 쓴 글이다. 哭(곡)자가 뒷면 첫 줄 아래로 배치된 것은 정조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규장전운의 시작부분. 여백의 빨간 글씨는 다산이 쓴 글이다. 哭(곡)자가 뒷면 첫 줄 아래로 배치된 것은 정조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끊임없는 메모

다산의 작업량과 진행 속도, 그가 다룬 분야의 폭과 깊이를 보면 마음이 먼저 아득해진다. 어떻게 이런 작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다산 학술의 바탕을 이루는 공부와 학습의 방법에 대해 몇 차례 살펴보겠다.

다산이 읽었던 책에는 곳곳에 그의 메모가 남아있다. 읽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나, 기억해야 할 내용을 그는 책 여백에 습관적으로 썼다. 조금 호흡이 긴 생각은 별도의 공책에다 주제별로 정리했다.

다산가에 전해온 ‘규장전운(奎章全韻)’은 정조가 새로 펴낸 운서였다. 그 책 첫 면 상단에 다산의 메모가 있다. 메모 끝에 ‘신용(臣鏞)’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규장각 시절에 쓴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책 첫 면에 곡할 곡(哭)자가 들어가 상서롭지 못하니 둘째 면으로 밀어내라 한 정조의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운서에 굳이 안 넣어도 될 어려운 4글자를 일부러 추가해 둘째면 첫 자리에 ‘곡’자가 배치되도록 조정했다는 사연이다.

불쑥 적어둔 이 메모를 통해 당시 정조가 어떤 식으로 신하들을 독려하고,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챙겼는지 알 수가 있다.

논문 한편에 값하는 메모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다산의 손때가 묻은 ‘독례통고(讀禮通攷)’란 책이 소장되어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산의 메모가 빼곡하게 줄지어 나온다. 이 메모들은 해당 본문에 대한 코멘트와 자기 생각을 담았다. 때로는 논문 한편에 해당하는 규모 있는 기록도 들어 있다.

메모마다 어김없이 적은 날짜와 장소, 심지어 당시의 몸 상태까지 적었다. 적소(謫所)에서 병중(病中)에 썼다고 한 메모는 아픈 중에도 붓을 들던 광경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진다. 책 속의 메모는 1802년 5월 22일부터 1810년 8월 23일까지 8년 넘게 지속되었다. 예학에 관한 다산의 생각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또 자신의 저술에 반영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이 가운데 권 49에 실린 1802년 9월 5일의 메모는 분량이 많고 내용도 흥미롭다. 다산은 서두에서 쟁점을 먼저 정리하고, 이에 대한 사계 김장생의 주장을 소개했다. 이어 성호 이익이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을 자세하게 실었다. 다음 면의 첫 줄은 ‘용안(鏞案)’으로 시작되는데, 앞서 두 사람의 상이한 관점에 대해 다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놀랍게도 다산은 성호의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호의 주장이 잘못임을 조목조목 축조 분석한 뒤, 자신은 김장생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겠노라고 썼다.

'독례통고' 본문 위에다 빼곡하게 자신의 견해를 메모해둔 다산. 다산은 급히 메모했던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또 다른 책을 묶어내기도 했다. 영남대 동빈문고 소장
'독례통고' 본문 위에다 빼곡하게 자신의 견해를 메모해둔 다산. 다산은 급히 메모했던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또 다른 책을 묶어내기도 했다. 영남대 동빈문고 소장

다산은 이렇게 긴 기간에 걸쳐 적어둔 메모를, 해배 후인 1821년 7월에 제자 되기를 청하며 두릉으로 찾아온 이인영이란 젊은이의 손을 빌어 정리했다. 이것이 ‘여유당전서’ 상례외편(喪禮外編) 권 3에 실린 ‘예고서정(禮考書頂)’이다. 이 제목은 ‘독례통고’란 책의 정수리에 적은 적바림을 옮겨 썼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서 책의 여백에 쓴 메모 묶음이 한편의 독립된 저술의 일부로 재탄생했다.

다산의 이른바 500권 저서 중에는 이 같은 정리의 결과물들이 적지 않다. 보통 고서는 3권을 1책으로 묶고, 이것을 활자로 바꾸면 2책 또는 3책 정도가 오늘날의 책 1권 분량에 해당한다. 다산의 저서 500권은 요즘 식으로 환산하면 70여책 분량쯤 될 것이다.

속필과 속기(速記)

앞서도 보았듯 다산은 속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손이 빠른데다 총기가 뛰어나 대화를 그저 옮겨도 거의 녹취록 수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1789년, 28세 나던 4월, 다산은 마침내 급제하여 내각의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다.

하루는 정조가 초계문신들을 소집했다. 최정예 신진기예가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학’을 주제로 한 즉석 토론회가 열렸다. 임금은 “소학은 무엇이고, 대학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서두를 열었다. 다산이 대답하자, 다시 질문이 떨어졌다. “대학과 소학은 학교의 명칭이냐, 아니면 학문의 명칭이냐?” 다산이 주자의 서문을 근거로 학교의 명칭이라고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15세에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자. 14살인데 소학 공부가 아직 부족할 경우 대학으로 승급시켜야 할까? 그대로 유급시켜야 할까?” 다산은 공부는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부터 임금은 빠졌다. “이제부터는 너희들끼리 묻고 또 대답하며 토론해라.” 다산은 그 바쁜 문답의 와중에 쉴 새 없이 붓을 놀려 오가는 대화를 붙들어 두었다. 들으랴 말하랴 적으랴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임금은 말없이 오가는 문답을 듣고만 있었다.

챕터 별로 나눠 진행된 긴 토론이 마무리 되었다. 임금은 이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앉혔다. 그리고는 ‘대학’ 전체에 대한 총론 격의 종합 토론을 한 차례 더 진행시켰다. 다산은 현장의 거친 메모를 들고 집으로 와서 폭포수처럼 쏟아진 질문과 대답을 수미가 일관된 한 권의 책자로 정리해냈다.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가 그 책이다.

녹취한 것을 옮겨 적어도 정리가 힘들 작업을 그는 기민한 손과 놀라운 암기력으로 완벽하게 복원해냈다. 중간중간 당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대답은 ‘금안(今案)’, 즉 ‘지금 생각해보니’란 말로 구분해서 추가하기까지 했다.

정조의 문답식 학습법

다산이 메모와 카드 작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정조의 이렇듯 매서운 학습법에 훈도된 결과다. 23세 때인 1784년 여름, 정조는 ‘중용’에 대해 80여 조항의 질문을 내렸고, 다산의 답안은 당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또 30세 나던 1791년 겨울에는 ‘시경’에 관해 한꺼번에 무려 800여 조목의 질문이 내려왔다. 임금은 40일의 시간을 줄 테니 답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핑계는 활쏘기에서 과녁을 제대로 못 맞춘 벌이었다. 질문을 보고 놀란 다산이 20일을 더 요청해 겨우 두 달의 말미를 얻었다.

정조는 다산에게 '시경'에 대해 물었다. 무려 800여개의 질문이었다. 정조는 두 달 동안 공부한 끝에 내놓은 다산의 답안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다는 '어평(御評)'을 내린다. 다산은 이 어평을 '시경강의'에 옮겨 적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정조는 다산에게 '시경'에 대해 물었다. 무려 800여개의 질문이었다. 정조는 두 달 동안 공부한 끝에 내놓은 다산의 답안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다는 '어평(御評)'을 내린다. 다산은 이 어평을 '시경강의'에 옮겨 적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다산은 먼저 메모용 공책을 몇 권 마련했다. ‘시경’의 체제에 따라 챕터 별로 공책을 달리해서, 사서오경과 각종 고문 및 제자백가, 그리고 역사서에서 ‘시경’이 단 한 구절이라도 인용된 것이 있으면 순서에 따라 해당 대목을 옮겨 적었다. 집중해서 작업하자 몇 권의 서브 노트가 만들어졌다. 중간중간 질문에 대한 답변 메모도 함께 진행해야만 했다.

임금의 질문은 세밀하고 구체적인 지점에 닿아 있었고, 이제까지 모든 ‘시경’ 관련 저술의 총량이 결집된 방대한 분량이었다. 다산은 질문을 앞에 놓고 해당 내용이 인용되었거나 관련 언급이 실린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미리 꼼꼼하게 정리해둔 서브 노트가 작업 진행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답도 대답이지만 무엇보다 질문의 내공이 무시무시했다. 학술군주로서의 정조의 면모가 그 질문 속에 다 들어있다. 다산은 꼬박 두 달간 작업해서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의 답변은 질문을 압도하는 꼼꼼한 논증과 해박한 논거 제시로 임금을 다시 놀라게 했다.

문답 순서대로 정리한 책자가 올라가자, 임금은 어필(御筆)을 들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널리 백가(百家)를 인증하여 나오는 것이 끝이 없다. 진실로 평소에 쌓아둔 것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랴. 내가 돌아보아 물어본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泛引百家, 其出無窮, 苟非素蘊之淹博, 安得有此. 不負予顧問之意, 深用嘉尙.)”

다산은 임금의 비평이 곳곳에 즐비하게 붙은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다가, 18년 뒤인 1809년 가을에 강진 유배지에서 답변을 더 보충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 집안에 전해 오던 가장본 ‘시경강의’ 앞쪽에 다산은 정조의 이 말을 특별히 큰 글씨로 썼다. 무서운 질문에 눈부신 대답으로 군신 간에 일합이 오갔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책 앞쪽에 정조께서 내린 비평을 옮겨 적으며, 돌아가신 임금이 그리워 주르륵 눈물을 떨궜다.

평소의 습관적 메모와 카드 작업의 위력을 잘 보여준 성과였다. 정리 후에도 ‘시경강의’에 질문 항목이 없어 미처 활용하지 못한 카드가 꽤 많이 남았다. 다산은 그것만 따로 추려서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란 별도의 책자로 묶었다. 당시 중풍으로 마비가 와서 몸이 몹시 힘들었는데도 자신의 구술을 제자 이정에게 받아 적게 해서 이 작업마저 마무리 지었다.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임금이 묻고 다산이 대답했다. 임금이 세상을 뜬 뒤에는, 다산이 묻고 제자들이 대답했다. 공부는 이렇게 문답과 메모를 통해 대물림 되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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