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8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50대 남성이 급히 경찰을 찾았다. “지인한테 문자가 왔는데 말이죠.
” 평소 금전 관련 상담을 해주면서 알게 된 이가 보냈다는 한 통의 문자메시지. ‘같이 일하던 여자를 죽여서 수원 공영주차장에 버려두고 왔습니다. 사체는 00XX 번호 차량 안에 있습니다. 형님이 경찰에 신고를 해 놓으면 제가 이달 내로 자수를 하겠습니다.’ 살인 자백 메시지였다.
보통은 대부분 장난이다. 하지만 이번엔 시신을 버렸다는 장소가 명확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고약했다.’ 신고를 접수한 수원 중부경찰서는 고혁수 당시 형사과장을 필두로 여운철 강력계장, 강력4팀 형사들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현장은 문자 내용 그대로였다. 공영주차장, 00XX 번호판을 단 흰색 오피러스. 그 안에 60대로 보이는 여성이 숨져 있었다. 여성은 반소매 티셔츠와 긴 바지를 입고, 신발은 벗어둔 채 뒷좌석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안경 쓴 얼굴 밑 부분을 덮고 있던 물 티슈를 걷어내자 피가 모여 생기는 울혈이 보였다. 눈 결막에서는 모세혈관 등 내부 출혈로 인한 일혈점이 확인됐다. 목에는 끈으로 보이는 것에 의한 자국이 뚜렷했다. 외부에서 가해진 힘에 목이 졸리면서 질식사한 사람이 남기는 전형적인 흔적이었다. 뒷좌석 바닥에 있던 핸드백 안에서는 신분증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수원에서 게임장을 운영하고 있는 61세 유모씨였다.
주차장 주변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확인부터 시작했다. 스스로 범행을 털어놓는 범인이라면, 자신을 숨길 만한 행동을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시신이 발견된 차량에서 누군가 내리는 장면이 찍혀 있는데,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황급하게 우산을 썼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얼굴은 왜 가리는 거지?” 공영주차장은 넓은 주차장 규모에 비해 CCTV 설치 대수가 적었다. 그만큼 촬영 범위도 넓어 용의자 얼굴과 신체 특징을 포착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시간에는 근무 중인 직원도, 목격자도 없었다.
수사팀 또 다른 일원은 문자를 보낸 사람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휴대폰 명의자 확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44세 박모씨. 현재로서는 누가 뭐래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통화 내역을 살펴보던 중 수상한 점이 발견됐다. “2년 동안 주고 받은 문자는 잔뜩 있는데, 이상하게 통화기록은 거의 없었어요.” 그는 피해자 유씨와도 문자메시지로만 연락을 주고 받았다. 살인을 자백한 것도 18일 보낸 문자메시지, 그보다 이틀 앞선 16일 오후 유씨와 만나자는 약속 역시 문자메시지로 했다.
통화기록은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유일했다. 직접 걸어보니 “잔액 조회는 1번, 자동충전 서비스는 2번, 선불요금 관련 문의는 3번을 눌러주십시오”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선불폰’이었다. 사전에 충전한 일정 금액만큼 사용이 가능한 휴대폰으로, 충전을 하려고 통신사에 전화를 건 것이다. 선불폰은 신분증만 있으면 제대로 된 본인 확인 없이도 개통이 가능해, 대포폰 등 범죄에도 자주 악용되곤 했다. “충전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통화는 아무랑도 하지 않으면서 특정 몇 명과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건데…” 이정준 당시 강력4팀장은 당시를 그렇게 떠올렸다. “그때까지 수사를 하면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 통화 내역을 살펴봤는데 이런 경우를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인 것과는 확연히 달랐어요.”
박씨 가족과 주변인 탐문도 빼놓을 수 없었다. 박씨 행방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만나고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그 과정에서 박씨 누나로부터 “동생이 사업 문제로 2년 전 출국한 뒤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박씨가 문자메시지로만 휴대폰을 사용했던 시점과 일치했다.
결정적 단서는 CCTV에서 발견됐다. 범인이 자신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우산이 예상치 못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CCTV 속 차 안에서 나온 남자는 어느 순간 화면에서 사라졌지만, 대신 흰색 비닐봉투 안에 접은 우산을 넣어 들고 다니는 남성이 다른 화면에 등장했다. 체격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그는 수사팀이 이미 알고 있던’ 남자였다. 박씨 주변인 탐문을 하던 중 참고인 조사를 받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했던 동업자 김모(60)씨였다. 그는 피해자 유씨와도 사건 전날 수 차례 문자와 통화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도 확인됐다.
경찰은 휴대폰 주인이, 그리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박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결론지었다. 이에 더해 박씨를 사칭해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띄어쓰기가 전혀 돼 있지 않았는데, 그건 김씨의 평소 버릇이었다. 그런데 김씨는 왜 하필 박씨를 사칭했을까, 박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나 박씨도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수사팀이 머리를 맞댔다. 이런저런 의문과 추정이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박씨가 살아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수시로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 등 자주 병원을 다녔더군요. 그런데 2014년 10월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진료를 받은 기록이 없었어요.” 병원 진료내역에서 파악된 내용이었다.
금융거래 기록도 2년 전부터 끊겨 있었다. 다만 선불폰 충전 비용으로는 틈틈이 돈이 나간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이 박씨 이름으로 김씨가 만든 임의 계좌에서 지급된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김씨가 박씨 부탁으로 대신 충전해줬을 가능성도 있다. “2년 전부터 박씨가 살아 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그나마 있던 선불폰 충전과 문자메시지 발송 역시 김씨가 한 걸로 나온 겁니다. 박씨가 이미 사망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경찰 수사가 김씨에게 집중됐다. 얼마 후 김씨 집 주변 CCTV에서 김씨가 사건 당일 주차장 인근 CCTV를 통해 파악된 남성과 동일한 비닐봉투를 들고 있는 모습이 확인됐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압수수색과 동시에 김씨를 체포했다.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김씨는 경찰이 내민 CCTV 화면 앞에서 금세 무너졌다. 17일 늦은 밤 유씨와 만난 김씨는 게임장 경영과 수익 분배 등을 두고 이야기하다 다툼을 시작, 격해진 감정을 참지 못한 채 승용차 조수석과 콘솔박스 사이에 있던 휴대폰 충전케이블로 유씨 목을 졸라 살해했다.
유씨 살해 경위는 밝혀냈지만, 수사팀이 풀어야 할 숙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박씨의 존재. 김씨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라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 수사 전체를 지휘하던 고혁수 형사과장이 직접 나섰다. 고 과장은 박씨와 사망한 유씨, 김씨 셋이 함께 사설경마장 사업을 했고, 그 과정에서 돈 문제를 겪고 있었고, 특히 김씨가 박씨 권유로 대출을 받아 1억 4,000만원을 투자한 뒤 제대로 수익을 정산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분명 금전관계가 있으니 억울한 면이 있을 수도 있었겠죠. 유씨를 살해한 것도 박씨를 살해한 사실이 들통날까 저지른 일일 수도 있었다고 봤어요. 그런 부분까지도 납득하는 척하며 자백을 하게끔 설득했어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추궁은 실패, 세 번째 조사가 시작될 무렵, 김씨가 입을 열었다.
박씨가 살해된 건 역시나 김씨가 박씨 행세를 하기 시작한 2014년 10월 6일이었다. 동업을 하고 있던 박씨가 수익금 분배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갖고 있던 김씨는 그날 박씨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박씨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문을 잡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설경마장에 들어간 투자금액 빼 주고 이익금도 돌려주시오.” “사장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지금 돈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80㎝ 거구에 40대던 박씨에게 165㎝ 단신, 60대에 가깝던 김씨는 애초 상대가 되지 않아 힘에 밀려 바닥에 쓰러졌다. 이에 격분한 김씨는 무게 약 6㎏ 아령을 들고 와 박씨 발등과 뒷목, 머리를 연달아 내리쳤다. 김씨는 시신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 방 안에 있던 텐트로 시신을 감싼 뒤 노끈으로 묶었다. 다음날 새벽 5시, 박씨 승용차에 시신을 싣고 강원 홍천군 남면으로 간 김씨는 한 야산 비탈길 아래로 시신을 굴리면서 약 100m를 내려가 바닥에 놓은 뒤 흙으로 덮어 숨겼다.
경찰은 김씨 범행이 일찌감치 발각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가 박씨 시신을 버리기에 앞서 박씨 누나가 동생 집을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대범했다. “당신 동생이 내 돈을 갖고 해외로 도망갔다. 내가 망하게 됐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화를 냈다. 앞서 박씨 명의로 개통한 선불폰으로 “사업차 해외로 나가게 됐다”는 문자를 박씨 누나에게 보내둔 것도 치밀했다. 박씨 누나는 김씨가 동생을 죽인 살인자인지도 모른 채 수 차례 사죄와 사례만 하고 집을 떠났다. 이후 김씨는 박씨가 자신에게 빚진 돈을 대신 갚으라며 박씨 가족에게 접근, 실제 여러 차례 상당한 돈을 받아가기까지 했다.
2016년 12월. 1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명의로 휴대폰을 개설해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등 죄의식이나 뉘우침이 전혀 없는 태도를 보인 점, 2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른 점, 피해자들과 동업하면서 돈 관계로 다툼이 있을 때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피해자들을 살해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수원=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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