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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기억하시나요? ‘그때 그 갑질’

입력
2018.05.0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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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회항’에 ‘물벼락 갑질’에... 대한항공을 무대로 한 ‘갑질의 역사’는 시즌제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데요. 비단 대한항공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종근당, 미스터피자, 대림산업… 당장 머리를 스치는 ‘갑질’ 오너들의 스캔들만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지난 몇 년간 갑질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문제적 회장님들’을 한국일보가 되돌아봤습니다.

기획, 제작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땅콩의 품격’에 앞서 ‘라면의 품격’을 논했던 선구자가 있었다. 포스코에너지의 전 상무이사 왕모(68)씨. ‘라면상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갑질 공화국’의 위상을 떨친 바 있다.  

2013년 4월 15일 LA행 대한항공 A380기, 비즈니스석 승객이었던 그는 기내 주방인 갤리로 난입해 들고 있던 잡지의 모서리로 승무원의 눈두덩이를 내리찍었다. ‘라면이 짜다’는 이유였다.

미국 땅에서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FBI. “기내 승무원 폭행은 테러행위다. 구속 수사를 받든 지 여기서 당장 귀국하라.” 울며 겨자 먹기로 되돌아온 그는 머잖아 한국 갑질의 아이콘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항공 사내 게시판엔 직원들의 안위를 사려 깊게 걱정하는 한 임원의 글이 올라왔다.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습니다." 글쓴이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로 그 사람. ‘땅콩 회항’ 사건의 장본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4년 12월 1일, 그는 같은 비행기 안에서 같은 방법으로 사무장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라면상무 사건도, 자신의 글도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햇수로 4년이 흐른 지금, 대한항공을 무대로 한 ‘갑질의 역사’는 시즌제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비단 대한항공만일까. 지난 몇 년간 갑질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문제적 회장님들’을 되돌아보자. 

“엎드려, 한 대에 100만 원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사건은 실제로 영화가 됐다. 2015년 여름 1,400만 관객을 불러모았던 영화 <베테랑> 속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役)의 모델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 최철원 당시 M&M 대표다.

2010년 10월 18일 서울 용산의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50대 화물기사 유모씨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오너였던 최철원 대표였다. 당시 유씨는 다니던 회사가 M&M으로 인수ㆍ합병되면서 고용승계가 안 되는 바람에 1년 이상 벌이가 없던 상황.

그가 예상했던 것은 ‘협상’이었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 황당한 명령이 떨어졌다. “엎드려라.” 7~8명의 간부들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난데없이 야구방망이가 등장했다. 상황 파악도 전에 내리 10대를 맞았다.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유씨가 몸부림을 치며 무너졌다. 그의 몸 위로 수표가 떨어졌다. ‘맷값’ 2,000만 원이었다. 사과를 요구한 유씨에게 기업 임원들은 답했다. “이 자식이 이거 형편없는 새X 아니야. 내가 볼 땐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는데.”

그 해 12월 서울지방경찰청의 소환을 받고 출두한 그의 모습에선 흔히 등장하는 휠체어도 마스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서 하듯 ‘빠따’로 훈육한 것이다.” 피해자는 최씨 보다 11살 위였다.

1심에서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건을 담당했던 박철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는 최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자마자 돌연 사표를 냈다. 그리고 이듬해 SK그룹에 전무로 입사했다. 직무는 ‘윤리경영’.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여실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회장님 운전기사는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VVIP의 운전기사는 ‘상시 모집’이었다.  2015년 당시 그의 고급 세단을 거쳐간 운전사만 1년 새 무려 40명. 재벌 3세인 이해욱 전 대림산업 부회장의 이야기다.

‘백미러를 접고 운전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에 목숨이 위험했던 적도 수 차례. “이 컵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데, 이게 한 방울도 흘러내리면 안 돼. 출발할 때든 멈출 때든.” 신경쇠약에 걸린 기사들은 3일씩을 내리 굶었다.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대표는 아예 ‘갑질 매뉴얼’을 제작했다. “A4 140장에 달하는 수행기사 매뉴얼이 따로 있었어요. 모닝콜은 받을 때까지. ‘가자’는 문자가 오면 ‘번개같이’ 뛰어 올라와라.”  매뉴얼엔 ‘사장님께서 빨리 가자고 하실 땐 교통법규도 무시할 것’이라는 문구가 붉은 글씨로 강조돼 있다.

“급할 땐 갓길을 타고 역주행하기도 했어요. 한 달간 제가 뗀 과태료만 500~600만 원이었죠.” ‘갑질 매뉴얼’이 2016년 언론에 공개되며 여론의 맹비난을 받았지만, 정씨가 낸 벌금은 고작 300만 원. 그가 한 달에 내는 과태료의 딱 절반 값이었다.  

  “이 XX, 하면서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죠. 술 냄새가 났어요.”

 2016년 4월 3일 경비원 황모 씨는 하던 대로 밤 10시가 되자 건물의 정문을 걸어 잠갔다. 어디선가 60대 남성이 잔뜩 흥분해 삿대질을 하며 나타났다. “내가 아직 여기 있는데 출입문을 닫아?”

식당 안으로 끌려 들어간 황씨는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폭행을 당했다. 알고 보니 정우현 전 MP그룹 미스터피자 회장이었다. 그가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한 곳은 건물 1층의 계열사 지점. 자신의 건물도, 미스터피자의 직원도 아니었던 황씨를 단지 ‘자신이 안에 있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때린 것.

당연하다고 체념하는 순간 괴물을 키우는 법. 4년 전 겨울, 낯선 이국 땅의 황량한 공항에 홀로 쫓겨난 18년 차 승무원은 한 때 ‘하얀 제복, 푸른 비행기’만 봐도 가슴이 뛰었던 '뼛속까지 대한항공인'이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박창진 사무장은 그간 자신이 ‘개’였음을 깨달았다. " 나는 더 이상 개가 아니다. 사람이다.”'강준만 교수는 ‘갑’이란 어디선가 하루아침에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갑들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갑질’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수많은 ‘을’들과 그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 ‘시스템’. 4년간 숙성된 분노는 배가 됐다. 2014년 당시에는 ‘쉬쉬’하고 묻혔던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횡포가 내부자의 증언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강 교수는 ‘땅콩 회항’ 사건을 해석한 글의 말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특정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넘어서 그런 상황을 일상화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획, 제작 :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합뉴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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