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모아 스토리 구성하고
촬영ㆍ편집 과정을 거치면
30초짜리 제작에 1주 넘게 걸려
만화책으로 키워온 상상력이
젊은 트렌드 읽는 밑천 된 듯
오래 일하려면 멀티플레이어 돼야
5평(약 16.5㎡) 남짓한 공간. 5~6명 가량이 작업할 수 있는 컴퓨터와 책상이 놓여있다. 작업실의 문에는 ‘OAP팀’이라고 쓴 표지판이 붙어있다. 매우 난이도 높으면서도 비밀스러운 작업을 하는 공간처럼 보였다. OAP(On Air Promotion)는 방송프로그램 홍보를 뜻하는 단어로 OAP팀은 홍보용 예고편을 만든다. OAP는 방송사로선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이다.
작업실의 ‘지휘관’은 고동일(42) IHQ미디어의 크리에이티브 서비스팀장. OAP팀장에서 최근 부서명과 직함이 바뀌었으나 하는 일은 동일하다. IHQ미디어는 코미디TV와 K스타, 드라맥스, AXN, 라이프U, 큐브TV 6개 케이블채널을 소유하고 있다. 고 팀장은 컴퓨터를 들여다 보며 이달 방영 예정인 새 드라마 ‘리치맨’을 한창 편집 중이었다. 그는 팀원 7명을 거느리고 있지만 상석으로 분류할 만한 자리는 딱히 없다. “지금 드라마 장면을 편집하는 중입니다. 제가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이 곳에서 이뤄지거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출을 받았다. 바로 옆에 마련된 회의실로 향하더니,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그리고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0여분이 지났을까. 다시 OAP팀 작업실로 돌아온다.
“예고편에도 스토리가 있다”
케이블채널 코미디TV의 인기 프로그램인 ‘맛있는 녀석들’은 최근 ‘웃기는’ 예고편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음식 이름으로 끝말잇기 게임을 하는 듯한 영상이 귀에 익은 음악과 함께 전파를 탔다. 30초 남짓의 영상에서 ‘맛있는 녀석들’의 출연자 김준현 유민상 김민경 문세윤은 한 가지씩 음식 이름을 말한다. 그러면 중간에 ‘한입만’이라는 자막이 뜨면서 끝말잇기가 시작된다. 게임도 리듬감이 없으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 추임새 ‘한입만’이 흥을 돋웠다. “김치찜 (한입만~) 찜닭 (한입만~) 닭곰탕 (한입만~) 탕수육(한입만~)…” ‘한입만’은 유재석 강호동 이휘재 등이 출연한 KBS 예능프로그램 ‘일요일은 즐거워’에서 선보였던 게임 ‘쿵쿵따’에서 리듬을 따왔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여주고, ‘한입만’ 먹어야 하는 벌칙의 내용이 적절히 조합됐다. ‘맛있는 녀석들’만의 특징이 잘 살도록 고 팀장과 팀원들이 만든 솜씨다.
어떻게 만들어질까 궁금했다. 고 팀장은 “시작점은 단순”하다면서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짚어본다”고 했다. 즉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하고, 시청자들이 왜 이 프로그램을 보는지를 먼저 떠올린단다. ‘맛있는 녀석들’의 경우 남녀노소 모든 연령층이 시청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2015년 시작해 3년을 방송하는 장수 프로그램이 됐다.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는 ‘먹방’은 계속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맛있는 녀석들’은 매회마다 메뉴가 달라지니 끝말잇기도 가능할 것 같더군요. ‘쿵쿵따’를 기본 리듬으로 만들었더니 딱 맞더라고요. 맛있는 감성 여행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도 담았고요.”
30초짜리 짧은 영상이라고 뚝딱 만들어질 것이라 예단해선 안 된다. 고 팀장은 이 예고편을 만드는 데 1주일이 넘게 걸렸다. 기획단계부터 아이디어를 모아 이야기를 구성하고 편집 과정을 거친 시간이다. 보통 한 프로그램의 예고편이 만들어지는 데 “7.5일”이 걸린다. 2~3달에 한 번씩 프로그램당 예고편을 제작한다. 고 팀장은 기획단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스토리나 메시지가 확실하게 정해져야 생명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고편을 만드는 일도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요. 대중의 공감을 얻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16부작 미니시리즈나 영화 한 편을 만든 것과 똑같은 공력이 들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느라 애를 쓴다. 아이디어는 일의 시작이다. 그래서 메모는 필수다. 그의 주변에 항상 수첩이나 메모장을 두는 이유다. 어던 예고편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원인을 분석해 기록해 둔다. 부족한 부분을 적어두면 나중에 틀림없이 “동기부여가 돼” 더 노력하게 된다. 고 팀장은 작업할 때마다 프로젝트나 달, 월별로 기록물을 남긴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곤 한다. “일에 대한 반성까진 아니어도 무언가 얻어지는 게 있더라고요.”
‘맨 땅에 헤딩’ 하던 OAP의 신세계
‘OAP 프로듀서 모집’. 우연히 포털 사이트에서 본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다. 2002년 방송의 ‘방’자도 모르던 그가 방송업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막연하게나마 “방송국 일”에 관심이 많았다. OAP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방송 관련 업무라는 점에 더 끌렸다. 방송기술을 배워 테크니컬 디렉터(TD)가 되고 싶었다. 곧바로 지원서를 냈다. 당시 온미디어(현 CJ E&M에 인수합병)에 들어가 7년을 근무했다. ‘맨 땅에 헤딩’했던 시절이다.
OAP업계는 미대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디자인이나 모션그래픽 등 미술 쪽 전공자들이 많다. 고 팀장은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림 실력이 전혀 없다. 그 흔한 콘티도 못 그린다. 하지만 OAP 업무는 16년 전 고 팀장이 입사할 당시만 해도 생소한 분야였다. 숙련자가 많지 않아 전공자가 아니어도 일을 배울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그래픽을 다루는 기술 등 배경 지식이 부족하니 벽에 부딪혔다.
“그만둘까?”하고 회의가 들 때쯤 기회가 찾아왔다. 싱가포르의 한 케이블채널에서 한국에 전송할 콘텐츠를 만드는 OAP 프로듀서를 찾고 있었다. 2009년 “한 번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무작정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외화를 방영하는 AXN채널에서 근무했다. 당시만 해도 AXN채널의 한국지사가 없어서 현지에서 직접 한국에 방영될 미국드라마 등 프로그램 예고편을 만들어 보냈다. 혼자서 한 달에 10여 개의 프로그램 예고편을 책임졌다. 한국인은 고 팀장뿐이었다. 2년 후 한국지사가 생긴 뒤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시장이 그의 담당이었다.
고난이 시작됐다. 한국으로 콘텐츠를 보낼 때는 한국어 자막이나 그래픽을 써서 별다른 문제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동남아는 접근법 자체가 달랐다.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했다. 해당 국가에 맞는 유머 코드나 유행 언어 등을 공부했다. 한국어로 달던 자막도 영어로 표현했다. 기획부터 스토리 구성, 편집, 그래픽, 자막 등의 업무를 혼자서 해냈던 걸 떠올리면 “스스로 대견”할 정도다. 그는 10년 동안 싱가포르에서 근무했다.
“사람들은 종종 물어봐요. 영어를 잘 했느냐고. 여행가서 하는 영어 있잖아요, 딱 그 수준이었어요(웃음). 오히려 그게 저한텐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더 체계적으로 일도 배우고 영어 실력도 키울 수 있었으니까요. 뭣 모르고 덤빈 거죠. 하하.”
고 팀장은 지난해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혼을 하고 아들도 키우면서 한국이 그리웠다. 1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싱가포르와 다른 업무스타일도 감수해야 했다. 17년 전 고 팀장이 일했을 때와 다르지 않는 수직적 구조에 놀라기도 했다. “싱가포르에선 인턴이 사장에게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해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의견을 교환하죠. 수평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개방적이고 유연한 조직으로 보이는 방송계지만, “오히려 더 폐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고 팀장은 젊은 팀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더 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당당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짧은 수명… ‘어벤져스’급 멀티플레이어 돼야
고 팀장은 요새 “일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방송계에서 비교적 수명이 짧은 OAP 업무를 넘어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은 욕심도 있다. 최근 크리에이티브 서비스팀로 부서명이 변경된 이유가 있다. 여러 부서와 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OAP 관련 업무는 대개 편성팀과 90%를 협업했어요. 하지만 저희 팀은 현재 편성팀 60%, 제작팀 30%, 영업팀 10%, 해외판매팀 10% 등으로 거의 전 부서와 협업하고 있어요.”
이를 테면 각 부서에 맞게 영상물을 제작해 공급하는 식이다. 해외판매팀을 위해서 한국어자막을 영어로 재작업해 제공하거나, 영업팀에는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별 장면들을 모아 편집해서 주고 있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실험”이다.
최근에는 ‘맛있는 녀석들’처럼 브랜드 파워가 있는 프로그램 관련 상품을 제작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프로그램 특성상 먹는 것과 관련된 메뉴판이나 메뉴스티커, 달력 등의 제품 위주로 생산해 볼 계획이다. 출시하지 못하더라도 프로그램 영업이나 홍보에 도움될 만한 제품들을 제작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OAP 작업한다고 꼼짝없이 책상에 앉아 편집만 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말한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감각이 중요한 밑천이다. 그래야 20대 젊은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다.
그나마 그가 감각을 유지하는 비결은 만화책. 어릴 때부터 단골 만화방이 있을 정도로 만화책을 좋아했다. 일본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팬이다. 그의 만화 ‘H2’ ‘터치’ ‘크로스 게임’ 등 거의 모든 작품을 섭렵했을 정도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접하면서 다져진 무한 상상력이 그의 무기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OAP 전문가로서 다른 이들과의 차별화에 눈을 떴다. “전공자들과 구별될 수 있는 나만의 강점을 찾아” 나섰다. 탄탄한 스토리를 구성하는 아이디어였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 자신 있다고. 그는 각종 예고편에 들어가는 배경음악에 신경을 많이 쓴다. 잘 활용된 음악은 프로그램의 특성을 살릴 수 있어 더 효과적이다. “집에서는 조용한 재즈나 클래식을 듣고, 운전할 때 차 안에선 팝을 즐깁니다. 음악 장르도 편식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느 하나에 익숙해져 버리면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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