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
유대인 혐오만으론 설명 안 돼
나치가 소련 침공하며 학살 학습
과학기술 접목해 정교하게 발전
살아남은 유대인 나치군인과
희생당한 안네 프랑크의 차이는
국가ㆍ시민권의 유무에서 나와
홀로코스트의 원인은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인가. ‘블랙 어스’는 ‘유대인 혐오 = 홀로코스트’라는 통념을, 보다 엄중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치와 볼셰비키 양 진영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 주장한다. 유대인 혐오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유대인 혐오는 때마침 대중적으로 잘 먹혀 들었던 적당한 핑계거리였을 뿐, 본질은 다른 데 있다는 얘기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누구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잃은 사람들뿐이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키워드로 삼았다. 바로 국가와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문제다.
다시 말해, 저자는 경고를 하고픈 게다. 국가와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홀로코스트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구조를 보지 못한 채 ‘유럽에 만연한 유대인 혐오 감정’이라고만 말하는 건 유대인을 ‘법 바깥’의 존재로 내몬 뒤 거리낌없이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에게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저자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가지 퀴즈를 낸다. 유대인들을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설치된 나치의 ‘절멸’ 수용소 위치다. 자, 이들 수용소들은 어디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독일에는 없다. 강제 노동 수용소는 독일 곳곳에 있었지만, 절멸 수용소는 없었다. 어디에 있었던가. 폴란드 등 독일과 러시아 중간지대에 있는 국가들에게 있다. 인터넷에서 나치 수용소 관련 다크 투어리즘을 검색해보라. 대부분 이들 지역일 것이다.
홀로코스트라 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아우슈비츠’ 또한 폴란드 땅에 있다. 아우슈비츠가 가장 유명한 건 역설적이게도 상대적으로 편안(?)해서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잔혹했던 트레블린카, 베우제츠, 소비부르, 헤움노 같은 수용소 이름은 낯설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으로 끌려 간 사람은 모두 다 죽어서 증언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우슈비츠는 원래 강제 노동 수용소였으나 나중에 절멸 수용소로 바뀐 곳이다.
유대인을 그토록 효율적으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독일 땅에, 또는 점령지였던 프랑스, 벨기에 등에 절멸 수용소를 세워 싹 쓸어 담아 죽이면 될 일이었다. 왜 기차에 태워 대륙을 가로질러 동유럽에 실어 나른 다음 죽였을까. 저자는 이 비밀을 ‘이중 점령’이란 키워드로 풀어낸다.
나치도 처음부터 절멸까진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나치가 처음엔 착했다거나, 절멸이 우발적이라거나, 절멸에 대해 잘 몰랐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혐오했으나 본질적으로 계획적이라기보다 충동적 집단이었다. 집단학살을 선보인 건 오히려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공산체제 수립을 위해 소련 내부에서 ‘잔혹한 청소’를 시행해본 경험이 있는 스탈린은 자국 내 경험을 동유럽에 고스란히 적용시켰다. 이 때문에 전쟁사가들 사이에선 히틀러가 소련으로 진군해갈 때 점령지에서 약간의 자비만 베풀었다면 ‘해방자’로 칭송받으며 승전했을 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고 마침내 소련을 향해 진군해 들어간 나치가 발견한 것은 숙청의 흔적들이었다. 분류하고, 기차로 실어 나르고, 강제노동 시키고, 때에 따라서는 학살한 흔적들. 나치는 이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앞선 과학기술로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래서 나치가 세운 유대인 절멸 수용소는 독일과 소련 사이, 그러니까 폴란드 동부에서 러시아 서부에 이르는 옛 소련 점령지이자 당시 독일 점령지에 집중적으로 들어선다. 이 죽음의 벨트에 들어온 유대인은 죽고, 그렇지 않은 이는 살았다. 말하자면 독일의 유대인은 폴란드의 유대인보다 오히려 생존확률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이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나치 시대 유대인 기록자로 유명한 3인의 운명을 비교한다. 첫 번째, 유대인이자 나치 군인이었던 빅토르 클렘퍼러. 본인은 물론, 그를 보호해준 이도 살아남았다. 두 번째, 너무나 유명한 안네 프랑크. 본인은 죽었지만 보호해준 이들은 무사했다. 세 번째, 폴란드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겐블룸. 린겐블룸 본인은 물론, 그를 도왔던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총살당했다.
이 차이는 단 하나. 이중점령으로 인해 동유럽은 국가와 시민권이 증발한 진공지대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은 국가를 결코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포퓰리스트, 몽상적 혁명가들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홀로코스트는 혐오 감정 하나만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광란의 파티 같은 것이 아니라, 국가 부재상황에서 비(非)국민으로 분류된 이들에 대한 체계적 학살이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맥락에서는 조금 뜬금없이 읽히는 감도 있는데, 4ㆍ3, 5ㆍ18 같은 현대사의 비극을 떠올려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불순세력, 용공세력, 종북세력이란 이름으로 ‘비(非)국민화’ 전략이 너무나 자주 쓰이는 나라가 우리 아니던가.
블랙 어스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ㆍ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616쪽ㆍ2만8,000원
또 하나의 묘미는 미국 출신 저자임에도 이 책은 히틀러의 원모델을 미국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미시시피강은 니제르강(아프리카)이 아니라 볼가강이 되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미시시피강 너머로 인디언을 몰아냈듯, 독일인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언을 학살한 미국에게 광대한 아메리카 땅과 흑인 노예가 있었다면,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에겐 동유럽 땅과 슬라브민족이 있어야 한다. 제목 ‘블랙 어스’는 그래서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말 그대로 아프리카다. 다른 하나는 동유럽의 비옥한 흑토(黑土)다. 이 둘이 하나의 제목으로 겹쳐졌을 때는? 각자 상상해보자.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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