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신라호텔 망고빙수 이후
‘호텔 빙수 투어족’까지 생겨 나
20~30대가 손님 중 절반 차지
# 금가루 올리고 샴페인 뿌려 주고
8만원짜리 ‘돔빙수’까지 등장
“천인공노할 소비” vs “가치 있어”
“사진 찍을 준비 되셨나요?”
직원의 물음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손에 휴대폰이 장착된다. 테이블 위 그릇의 덮개를 천천히 벗기자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탄성과 함께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한다. 연기가 사라진 곳에 자태를 드러낸 것은 빙수다. 지난해 여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서울 호텔 37층에 위치한 ‘37 그릴 앤 바’에서 빙수를 시킨 테이블에서 이런 광경이 거의 매일 연출됐다.
다시 빙수의 계절이다. 나날이 화려해지고 무거워지는 빙수의 정점에 있는 것은 역시 ‘호텔 빙수’다. 드라이아이스가 동원되고, 솜사탕을 올리고 금가루를 뿌리고, 돔페리뇽을 붓는 등, 여름의 호텔은 럭셔리 빙수의 각축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이 도는 곳에는 욕도 함께 도는 법. 호텔 빙수는 매년 가격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런 패턴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어질 전망이다. 전국 거의 모든 호텔이 이달을 기점으로 빙수 판매에 돌입한다. 호텔 빙수를 향해 쏟아질 선망과 질타의 시선만으로 벌써부터 여름이 온 듯 뜨겁다.
빙수 전쟁의 서막, 신라호텔 망고 빙수
호텔들이 빙수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데에는 아무래도 신라호텔 망고빙수의 역할이 컸다. 2012년경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명 ‘신라호텔 망빙’ 사진들이 올라오면서 화제가 된 것. 사람들을 수군거리게 한 건 맛에 대한 찬탄과 더불어 가격이었다. 부가세 포함 4만2,000원이란 가격에 “어떻게 빙수 한 사발에!”란 불호령이 떨어졌고, 덕분에 신라호텔은 6년째 같은 ‘해명’을 반복 중이다.
신라호텔 홍보팀에 따르면 망고빙수에 사용되는 재료는 제주도산 최상급 애플망고로, 가격은 지난달 기준 6개들이 20만원 가량이다. 빙수에 들어가는 양은 한 개 반. 그럼에도 지금까지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상징성” 때문이다. “저희가 가격을 올리면 ‘빙수 가격마저’라는 제목으로 반드시 물가 상승 기사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호텔 측에선 빙수 홍보를 일체 안 하고 있어요.”
그러나 신라호텔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수많은 ‘호텔 빙수 투어족’을 탄생시켰다. 코딩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30대 남자 박일정씨는 퇴근이 늦었던 어느 여름 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들렀던 신라호텔에서 망고빙수를 시킨 것을 계기로 호텔 빙수에 입문하게 됐다고 한다. “호텔 빙수를 계속 찾는 이유는 첫째, 여유롭게 조용히 앉아 맛있는 빙수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둘째 매번 일정한 퀄리티의 빙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빙수 맛집 중 많은 곳이 성수기엔 동일한 맛과 비주얼을 유지시키지 못하거든요. 반면 호텔 빙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기에 전망이나 라이브 음악, 좋은 재료, 서비스까지 따지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충분히 보상한다고 생각해요.”
호텔업계에 따르면 주로 주말을 공략하는 이들 호텔 빙수족은 20~30대가 40~50% 가량을 차지한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손님 2,3명이 빙수 하나를 시켜서 나눠 먹는 풍경은 아주 흔해요. 테이블 중 남산타워와 잠실 롯데타워까지 내다보이는 자리가 있는데 너무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예약 없이 선착순으로 받고 있어요.” 여의도에 있는 콘래드 서울 홍보팀 현예슬 주임의 말이다. 콘래드 서울은 지난해 사진 찍기 좋아하는 젊은 층을 상대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드라이아이스 빙수를 출시해 전년 대비 판매 3배라는 성과를 거뒀다. 올해도 기대 중이다. 판매기간을 9월 중순까지로 늘리고, 잘 팔렸던 망고빙수와 더불어 팥을 올린 고전적인 빙수를 새로 선보인다.
파크하얏트 서울도 2014년 출시한 허니 빙수가 히트를 치면서 빙수 메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허니 빙수는 충북 제천 월악산에서 직송한 천연꿀과 사과 퓨레, 바닐라 크림, 구운 피칸, 그리고 큼지막한 벌집을 올린다. 지난해 6월을 기준으로 전년대비 2배의 판매고를 올리며 효자 노릇을 했다. 올해는 발로나 초콜릿으로 만든 당근 초콜릿 빙수를 새로 내놨다. 권예리 홍보팀 매니저는 호텔 빙수의 매력을 “호텔이란 특별한 공간을,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가격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하룻밤 숙박료가 30만~40만원선인 걸 감안하면, 여행지도 아닌 곳에서 1박을 한다는 건 젊은 층에겐 무리죠. 하지만 빙수는 그 10분의 1 가격으로 호텔 공간의 모든 걸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좋은 것에 가치를 지불하는 훈련
물론 가격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가 2015년 출시해 지금까지 최고가 빙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돔 빙수의 가격은 부가세 포함 8만원. 눈꽃 얼음 위에 구름 모양 솜사탕을 올리고 그 위에 금가루와 꽃잎을 올린 뒤 고급 샴페인의 대명사인 돔페리뇽을 부어준다. 돔페리뇽의 가격을 감안해도 8만원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있지만, SNS에 ‘체험기’를 올리는 이들이 늘면서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호텔 측은 올해 빙수 디저트 바 콘셉트의 한층 업그레이드된 빙수를 준비 중이다. 홍보팀 관계자는 “먹고 보고 공유하는 모든 과정에서 차별화할 필요를 느낀다”며 “앞으로도 고객의 흥미를 이끄는 색다른 빙수들이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요층이 쌓이면서 소비 논리도 점점 탄탄해지는 중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천인공노할 사치’라는 의견이 많았던 반면 이제는 납득 가능한 소비의 일종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 전국의 호텔을 돌며 빙수 투어 중인 30대 남자 양정진(가명)씨는 “메인 식사와 디저트 중 어디에 더 돈을 쓰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둘이서 삼겹살 3인분에 커피, 조각 케이크 하나 시켜도 6만원이에요.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호텔 빙수 나눠 먹으면 같은 가격이에요. 저는 밥을 먹으려고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대화하려고 식사 약속을 잡기 때문에, 밥보단 디저트 장소에 집중하는 게 당연해요. 쾌적한 공간, 편한 주차, 신선한 재료를 생각하면 호텔만한 곳이 없죠.”
욜로, 스몰 럭셔리, 소확행,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 등 최근 소비패턴을 설명하는 단어들의 핵심은 ‘없는 살림이지만 쓸 곳엔 확실히 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만든 것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한다’는 숨은 가치관이다. 1만원짜리 상품을 9,000원에 사는 것을 이득, 혹은 정다운 일로 여겼던 한국에선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고 비용을 지불하는 일 자체에 많은 훈련을 요한다. 호텔 빙수가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치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황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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