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단지 한 편에 만병초꽃이 피었다(아래 사진). 상록관목인 만병초 나무는 잎이 얼핏 인도고무나무 비슷한데 식물도감엔 진달래과 식물로 나와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꽃을 보니 의문이 풀린다. 진달래, 철쭉꽃과 닮았다. 실물 꽃을 접한 것은 이번 봄이 처음이다. 꽃 색이 노랑, 분홍, 적색 등 여러 종이 있는데 우리 아파트 것은 분홍 계통이다. 활짝 핀 모습도 예쁘지만 피기 직전 진분홍 꽃봉오리는 환상적이다. 페이스북과 단톡방에 예쁜 꽃 사진을 올렸는데 탄성을 지르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 뚝갈나무로도 불리는 만병초는 지리산과 울릉도, 강원 이북 지방의 고산지대에 자생하는데 울릉도엔 홍만병초, 백두산에는 노랑만병초 군락이 있다. 만병초라는 이름이 종종 오해를 부른다. 잎에 ‘그레이아노톡신’ 등의 독성 성분이 있어 차로 우려 마시거나 술을 담가 먹었다가 저혈압, 호흡곤란, 구토 증상을 겪는 일이 많으니 주의를 요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식용불가 식물로 지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한방에서는 우피두견, 석남엽 등으로 불리는 말린 잎을 항균·항염, 강심, 혈압강하 약재로 쓰기도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이 3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에서 4·27판문점 정상회담 뒷얘기를 전하다가 만병초 얘기를 했다. 정상회담 당일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 인근 ‘정주영 소떼 길’에 6·25 정전협정을 맺은 1953년 생 반송을 공동 기념식수한 것과 관련해서였다. 두 정상이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가져온 흙, 한강물과 대동강물을 함께 뿌리는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그 백두산 흙은 백두산 고산지대의 만병초 뿌리를 뽑아 거기에 붙은 흙을 일일이 털어 가져온 것이라고 김창선 북한 국무위원회 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밝혔다고 한다.
▦ 백두산 고지대는 화산암 지대로 흙이 거의 없다. 만병초가 자리잡은 곳에만 겨우 흙이 조금 있었을 테고 그것을 털어왔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백두산에서 그냥 몇 삽 퍼서 온 게 아니라 정성이 담긴 흙”이라고 북측 성의를 높이 평가했다. 백두산 고지대 극한지에서 한줌도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이어오며 여름 한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던 노랑만병초들. 이번에 뿌리 뽑혀 흙을 내어준 게 한두 그루가 아닐 터. 지구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반도의 봄’을 잘 이어가 풍성한 가을 결실을 내는 것만이 그 만병초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이계성 논설고문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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