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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차대전 배상금(5.1)

입력
2018.05.01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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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의 칼침' 음모론을 묘사한 1924년 독일의 한 일간지 카툰. 단도를 든 신사복 차림의 남성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등 뒤의 칼침' 음모론을 묘사한 1924년 독일의 한 일간지 카툰. 단도를 든 신사복 차림의 남성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이다. 위키미디어.

1차대전 승전국 프랑스와 영국은 전비 지출로 빚더미에 앉게 됐다. 두 나라는 영연방 등 각자의 해외 식민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징발해 썼지만 미국에 진 빚만 프랑스 40억 달러, 영국 46억 달러였다. 전후 베르사이유 조약(1919.5.7)으로 승전국들은 독일 영토를 조금씩 나눠 챙겼지만, 절실히 원한 건 빚을 갚고 경제를 재건할 현금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독일에 귀속시킨 조약 231조에 근거, 물적 손실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권국 미국 정부 역시 의회의 배상요구 압력이 거셌다. 1921년 5월 1일, 미-영-프 주도의 배상위원회는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액을 전액 금으로 지불할 것을 결정,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거기에는 물론 독일 재무장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자는 의도도 반영됐다.

하지만 현실성 없는 결정이었다. 독일은 배상 의지도 여력도 없었고, 승전국은 채무 이행을 강제 집행할 수단이 없었다. 거꾸로 저 요구는 독일 여론을 우경화하고 재무장 의지를 북돋우는 화근이 됐다. 2차대전과 달리 1차대전의 전선은 독일 본토 바깥에 형성돼 연합국의 공격은커녕 군인 구경도 못한 당시 독일 국민들은, 급조된 공화국 민간 정부의 갑작스런 항복(1918.11.11)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강국 미국이 적국으로 참전했다지만 불과 8개월 전 동부전선의 볼셰비키 러시아와 평화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이던 터였다. 전쟁 군부는 당연히 불리한 전황을 독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른바 ‘배후의 칼침(Stab in the back)’ 음모론은 패전 직후부터 독일 국민을 사로잡고 있었다. 전쟁에서 진 게 아니라 독일군으로 참전한 유대인과 인터내셔널 공산ㆍ사회주의자들의 배신 때문에 항복하게 됐으며, 권력에 눈 먼 민간 관료들이 군부를 밀어내고 거기 동조했다는 설. 그들은 공화국 관료들을 ‘11월의 범죄자들(November Criminals)’이라 불렀다.

참혹한 참호전을 치른 끝에 패잔병으로 귀향한 군인들과 생활고에 허덕이며 대를 이어 갚아도 못 갚을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게 된 독일 시민들의 분노와 절망감. 나치 득세와 급박한 재무장의 배경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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