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유공자 차명숙씨
가두방송 이유로 계엄군에 체포
보안대ㆍ교도소 오가며 고문당해
“살이 터져 흰 속옷이 새까맣게…”
진상규명위에 관련자 처벌 촉구
“그 날의 기억을 빼기(지우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5월과 마주한 그가 자신의 아픈 상처를 스스로 들춰냈다. 38년간 애써 지우려고 했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 악몽의 시간들을 끄집어 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5ㆍ18민주화운동과 자신을 둘러싼 진실이 왜곡되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경북 안동에 사는 5ㆍ18유공자 차명숙(58)씨가 30일 광주를 찾아 여성으로서 치욕 같은 ‘5ㆍ18 고문의 기억’을 하나 둘씩 꺼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다가 당시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505보안대 지하로 끌려간 뒤 끔찍한 고문을 당했죠.”
차씨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광주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 전파사에서 앰프(확성기)를 빌려 가두방송을 한 지 이틀 만에 붙잡혔다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보안대의 음습한 지하실로 끌려간 차씨는 무릎을 꿇은 채 계엄군의 무자비한 군홧발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가두방송을 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여간첩으로 몰렸던 차씨는 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에 끌려 다니며 고문을 받아야 했다. 차씨는 “고문으로 인해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나와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고, 하얀 속옷은 까만 잉크색으로 변할 정도였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차씨는 넉 달 뒤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구형 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뒤에야 계엄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모진 고문의 굴레는 계속됐다. 차씨는 1980년 9월 21일쯤 오후 교도관 3명에 의해 조사실로 끌고 갔고, 조사관들이 7개 ‘동태(시찰)사항’에 대해 자백을 강요했다. 수감 중 동료 재소자에게 불온한 발언들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도소 측은 자살을 막는다며 차씨에게 혁시갑을 채워 한 달간 징벌방에 가뒀다. 차씨는 “폭 10㎝ 두께 3㎝의 혁띠를 차고 25㎝ 쇠줄에 묶여있는 수갑을 양쪽 손목에 찬 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대소변까지 보면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차씨는 이어 “광주는 제가 잊어버리고 싶은 도시였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실제 군사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고 81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한 그는 89년 안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26년간이나 광주에 발길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차씨는 3년 전부터 다시 광주를 찾기 시작했다. 5ㆍ18 당시 계엄군들이 어린 여학생들에게 물을 끼얹은 뒤 어깨가 빠지도록 몽둥이로 등을 두들겨 패는 고문이 자행됐는데도 이런 사실들이 왜곡되고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차씨가 광주교도소 수감 당시 고문과 가혹행위를 한 관련자들을 찾아내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차씨는 “5ㆍ18진상규명특별법 시행에 따라 출범할 진상규명위원회가 80년 5월 당시 계엄군의 고문수사와 잔혹행위도 조사해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며 “특히 5ㆍ18기념재단 등 관련단체들도 5ㆍ18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외롭게 사는 여성들을 찾아내 그들의 소중한 증언을 듣고 역사적 진실로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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