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17세기 공화주의자로 크롬웰 청교도혁명 이후 공직자로 일했고, 왕정과 가톨릭ㆍ국교회의 보수주의에 맞선 급진파 논객으로도 활약했다. 청년기부터 소네트 등 시작에 능했던 그는 40대 중반(1651~1652년) 시력을 잃었고, 그런 저런 덕에 크롬웰 사후인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이후 투옥 위기를 모면, 재산과 일자리를 잃고 문학에 매진했다.
두 차례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과 사별 끝에 1662년 세 번째 결혼을 한 그는 일찌감치 이혼을 긍정하는 글을 써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고, 체벌 등 억압적 교육의 폐해를 비판했고, 일련의 정치 팸플릿으로 왕정을 공격하고 공화정을 옹호했다. ‘언론 출판 자유에 대한 선언’이라는 부제를 단 팸플릿 ‘아레오 파지티카’도 가톨릭 교회의 종교 사상적 억압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문건으로 근대적 천부인권의 가치를 선취한 논쟁적 글이었다. 한마디로 청장년기의 밀턴은 비판과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은 야심찬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하지만 ‘실낙원(Paradise Lost)’을 집필하던 50대 초반의 그는 여러모로 위축돼 있던 시기였다. 시력뿐 아니라 건강도 시원찮았고, 돈도 없고 정치적 이상도 좌절된 상태였다. 문학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당장 생계가 절박했다. 그는 출판업자 새뮤얼 시몬스(Samuel Simmons, 1640~1687)와 1667년 4월 27일 ‘실낙원’ 출판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 5파운드를 받고, 세 차례 1,300부씩을 찍어 매진될 때마다 5파운드씩 추가로 받는다는 계약. 총 20파운드에 그는 저작권 관련 모든 권한을 시몬스에게 넘겼다.
생전의 그가 받은 돈은 10파운드. 실낙원은 그가 숨지던 해에 2쇄를 인쇄했다. 1678년 3쇄를 찍었고, 부인 엘리자베스가 2년 뒤인 1680년 8파운드를 지급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옛 화폐 가치를 현재 기준으로 환산해 알려주는 한 사이트(www.measuringworth.com)에 따르면, 당시 5파운드는 구매력으로 볼 때 2016년 기준 약 784파운드(약 120만원)라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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