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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민중을 이길 권력자는 없다

입력
2018.04.19 18:2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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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윤달 6월에 다산이 곡산도호부사로 발령을 받고 부임해 간 후 몇 달 사이에 곡산부에는 대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 부임 직후 민란 주모자를 무죄로 석방한 사건을 일으키면서부터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자, 간사한 아전들은 벌벌 떨고 주민들은 자신들이 주인임을 인식하면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백성들이 힘을 받게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그 당시 정해진 세금의 종류로 황해도 감사가 공문을 봄ㆍ가을에 보내 하얀 꿀 세말과 누런 꿀 1섬을 징수해 갔다. 그런데 감영에 딸린 아전들이 멋대로 하얀 꿀 서 말을 여섯 말로, 누런 꿀 1섬을 2섬으로 받아가면서 감영에 지급되는 액수는 공문 숫자대로 하였다.

이런 사실을 파악한 다산은 “감영에서 하나를 구하는데 수령이 둘을 바치고, 감영에 누런 것을 구하는데 수령이 흰 것을 바치는 것은 아첨이다. 그 숫자와 색깔대로 다만 공문대로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랬더니 아전들이 “감영에 딸린 아전들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자들이므로 반드시 말썽이 일어날 것입니다. 백성을 위하다가 더 큰 고통만 당할 것이니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산은 “일단 가보아라”라고 말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아전들이 물리치고 받지를 않았다. 아전 대표가 감사에게 아뢰자, 감사가 “곡산부사는 그 고을의 백성들을 등에 지고 있고, 나는 내 입만 가지고 있으니 다툴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받아들이도록 명했다.

다산이 누구임을 짐작했고, 또 세상의 흐름에 조금의 눈치라도 알아차리던 감사의 판단도 훌륭했지만, 도대체 다산은 직속상관인 감사에게 어떤 이유로 그런 용감한 항거를 할 수 있었을까. 한 도의 관찰사인 감사야 직속 백성들이 없고, 고을 목민관은 군민 전체가 목민관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응원 세력임을 감사도 알고 있었지만, 다산은 이론적으로 이미 그런 정확한 민중의 힘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목민심서’는 직접 행정을 집행한 경험을 토대로 저작한 책이었지만, 이처럼 상관과 하관의 힘의 관계를 참으로 명쾌하게 정리해 놓았다.

“온 세상에 가장 천해서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백성들이지만 온 세상에 가장 높은 산처럼 높고 무거운 것이 또한 백성들이다.···상관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을 머리에 이고 싸우면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天下之至賤無告者 小民也 天下之隆重如山者 亦小民也 … 上司雖尊,戴民以爭,鮮不屈焉: ‘文報’)라고 말하여 감사의 지위와 권한이 목민관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곤궁하게 만들 수 있지만, 민심을 얻어 백성들이 뒷받침해준다면, 감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그런 무서운 논리를 다산은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군수가 군민들을 이끌고 도청 앞에 가서 군민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도지사에게 요구하는 오늘의 목민관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200년 전에 다산은 분명하게 민중의 힘을 알아차린 학자였다고 북한의 어떤 학자가 칭찬했던 대목이 바로 목민심서의 이 부분이었으니 참고해야 할 사항임이 분명하다.

목민심서의 재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감사의 명령에 거부하고, 지시를 따르지 않다가 잘못하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산은 감사와 싸우면 백성들을 머리에 이고 싸워, 감사를 굴복시킨 경상도 언양(彦陽)현감 정택경(鄭宅慶)과 강진현감 안명학(安鳴鶴)의 예를 들어서 쉽지 않은 용기를 내어 백성들을 동원해 감사와 싸우다가 이겼다면서, 본디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싸운 일이지만 수령에게 이익이 돌아왔다면서 그 두 사람은 그런 일로 명성이 크게 올라 벼슬길이 열려 더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사례를 열거하였다. 그러면서 훌륭한 감사는 비굴하게 아첨만 하는 수령을 내쳤다는 예를 들면서 두 번, 세 번 감사의 잘못에 항의하다가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과감히 인끈을 벗어던지고 수령직을 그만 둘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을 시작할 때는 파면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고,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다가 비록 파면을 당한다 하더라도 앞길은 열릴 수 있다는 희망까지를 언급하였다. 감사의 엉터리 지시나 부당한 명령을 따르다가 앉아 있으며 “백성들의 곤경을 보고만 있다가 마침내 죄책에 빠지는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라고 말하며 투쟁하다 당하는 불이익은 언젠가는 회복될 가망이 있다는 사필귀정의 원리까지를 설파하고 있었다.

200년 전 그때가 어떤 때인가. 전제군주국가의 통치체제이고, 그야말로 ‘상명하복’의 봉건적 지휘체제에서, 백성들을 머리에 이고 직속상관에게 부당한 행정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호소할 데도 없던 백성들, 그들이 뭉쳐 싸우면 민중의 힘으로 변하여 높고 무겁기가 백두산이나 한라산과 같다는 다산의 계명한 생각, 여기에서 우리는 무릎을 치며 목민심서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엉터리 지시나 부당한 명령에 항의하지 못하다가 우리가 당한 30년 군사독재의 서러움을 생각하면 역시 다산은 위대한 선각자였음이 분명하다.

다산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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