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날아간 신경제] <하> 해외로 가는 스타트업

헬스케어 관련 신생혁신기업(스타트업) ‘직토’는 이더리움 기반의 가상화폐 ‘인슈어리움’의 가상화폐공개(ICO)를 추진하고 있다. 인슈어리움은 향후 직토가 선보일 블록체인 기반 플랫폼에서 화폐 역할을 하게 된다. 직토는 총 300억원어치의 인슈어리움을 발행할 예정인데, 이중 ICO를 통해 200억원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직토가 법인을 세운 곳은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다. 서한석 직토 공동대표는 “우리나라에선 ICO를 하기 어렵고 앞으로 어떤 칼날이 날아올지도 몰라 해외에서 준비하는 게 마음 편하다”며 “해외에선 우리나라의 블록체인과 가상화폐 열풍에 관심이 큰데 정작 우리 정부는 글로벌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인 블록체인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정부는 블록체인을 미래 먹거리로 키운다는 전략 아래 올해 기술 연구개발(R&D)과 시범 사업 등에 143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직토처럼 현장의 블록체인 관련 스타트업들은 대부분 해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금융 당국이 지난해 9월 “모든 종류의 ICO를 금지한다”고 발표한 뒤 투자금 유치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ICO는 기업공개(IPO)에서 투자금을 받고 그 대가로 주식을 제공하듯 기업들이 외부 투자자들에게 가상화폐를 발행해 자금을 유치하는 것을 일컫는다. 특히 사업계획서(백서)만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는데다 현금이 아닌 가상화폐로 받기 때문에 전 세계를 상대로 투자를 유치할 수 있어 스타트업들은 ICO를 선호한다. 그러나 국내에선 ICO를 통한 자금 조달이 사실상 막힌 상황이다. 이 때문에 스타트업들은 스위스나 싱가포르, 에스토니아 등에 해외 법인을 설립해 투자자를 유치하고 나섰다. 업계에선 이미 유럽에서만 20여개의 한국 기업들이 ICO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당국과 업계의 시각차이 탓이 크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정부는 블록체인 육성 정책을 펼치고 있다”면서도 “ICO가 이뤄지는 양태를 볼 때 정부가 이를 허용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 대표는 “블록체인은 활성화시키고 가상화폐는 규제하겠다는 것은 전기차를 보급하겠다고 하면서 전기차 충전소는 규제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꼬집었다.

이렇게 해외로 떠난 업체들은 ‘대박’을 내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 ‘더루프’는 지난해 스위스에 법인을 만들고 1,000억원 규모의 ICO를 진행했다. 이는 지난해 코스닥 IPO 평균(372억원)의 3배에 달한다. ‘현대BS&C’도 스위스에 법인을 설립하고 가상화폐 ‘에이치닥’을 발행해 2,800억원을 유치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메디블록’도 영국령 지브롤터에 법인을 세운 뒤 ‘메디토큰’을 발행, 300억원의 자금을 모았다.

결국 세계적으로 불붙은 블록체인 산업에서 국내 경쟁력만 약해지고 있다. 지난해 3분기 전 세계 ICO 조달액은 13억2,700만 달러(약 1조4,200억원)에 달했다. 올해 ICO 규모는 100억 달러(10조6,000억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이미 ICO가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의 주요 자금조달 창구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인호 고려대 교수는 “새로운 시대의 글로벌 금융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우리 정부는 단점만 보고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 법인 설립을 추진 중인 블록체인 기반의 핀테크 신용공유 스타트업 ‘글로핀’의 신근영 대표도 “블록체인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ICO가 필요한데 지금 우리나라는 구더기가 무서우니 아예 장도 담그지 말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무작정 금지보단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으로 건전한 ICO 생태계를 만들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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