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양보’가 미덕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양보’는 뒤처짐과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양보(讓步). 사양할 양(讓), 걸음 보(步). ‘내가 걸음을 내딛지 않고 남이 먼저 가도록 사양하는 것’. 과연 양보는 더 이상 환영받지 않는 무능력, 무의욕의 상징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는 여전히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미덕이 될 수 있을까. 여러 분쟁을 중재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적인 관점에서 양보의 미덕을 생각해 본다.
첫째, 양보는 내 상황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한다.
양보는 내가 나아갈 수 있음에도 나아가지 않는 행위다. 내가 나아갈 수 없어 나아가지 않는 것은 양보가 아니다. 과연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에 대한 객관적인 자기직시가 선행되어야 양보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양보는 ‘양보할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한 자기 인식’과 ‘양보를 결단하는 의지’라는 2단계 과정이 필요하다. 멈추어 서서 내 상황을 파악하고 양보를 결심하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둘째, 양보를 하는 상황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
상대방과 어떤 점에서 충돌을 하고 있기에 내 양보가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상대방 요구의 내용, 요구의 이유, 요구의 간절함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정보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평온한 심리 상태에서 대화를 할 경우에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은 서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셋째, 양보를 통해 상대방의 성품을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양보를 했다. 상대방은 내 양보를 딛고 서서 자신이 뜻한 바대로 나아간다. 타인의 양보를 얻어 낸 사람이 어떤 처신을 하는가를 지켜보는 일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 양보를 온전히 자신의 성취 결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양보를 고맙게 여기고 다음에는 자신이 양보하려는 사람도 있다. 내가 양보하지 않고 앞질러 가기만 했다면 놓칠 수 있었던 상대의 처신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그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인 관계 설정에서 중요한 데이터가 될 수 있다.
넷째, 양보는 내 주위 평판을 좋게 한다.
내가 나아갈 수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일은 오늘날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흔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내 가치를 높여준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자기를 먼저 내세우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평범한 모습과는 다른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어? 저 사람에게 저런 면도 있었네?’라며 다시 보게 된다.
왜 동양 고전에서는 양보를 권할까? 사람은 원래 타고나기를 착하게 태어났고, 그것이 본성에 부합하기에 양보를 권하는 것일까? 채근담(菜根譚)이나 신음어(呻吟語), 세설신어(世說新語)와 같은 처세서들이 우리에게 양보를 권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세상 인심은 수시로 변한다. 지금 내게 우호적인 사람도 그 마음이 바뀌어 나중에는 내게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 따라서 할 수 있을 때 보험을 들 듯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아두어야 나에게 닥칠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처세서들은 이렇듯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양보를 강조한다.
“處世,讓一步爲高。退步,卽進步的張本(처세,양일보위고。퇴보,즉진보적장본)”-채근담-
“세상을 살아갈 때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이는 물러서는 것이 곧 앞으로 나아갈 밑천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에 작은 일이라도 한 개씩 양보하면서 나의 적선지수(積善指數)를 높여보고 싶다. 보험을 들 듯이···.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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