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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잠수사로 세월호 유족 도왔지만… 죄인 누명 시달리다 잊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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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잠수사로 세월호 유족 도왔지만… 죄인 누명 시달리다 잊혀져

입력
2018.04.14 09:0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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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4주기]

#2014년 절망의 검은 바다

자발적으로 모인 후배들과 함께

석달 가까이 292명 수습했지만

정부 “다른 잠수사들과 계약”

#목숨 걸었지만 적반하장 정부

이광욱 잠수사 현장서 사망하자

검찰은 공씨를 과실치사 기소

1ㆍ2심 이어 대법서 “무죄” 확정

#후유증 시달리는 잠수사들

트라우마 앓다가 목숨 잃고

대부분 골괴사 질환 고통에도

보상은 산재 기준에도 못 미쳐

대법원 무죄 판결문을 들어 보이는 공우영 잠수사. 이진희 기자
대법원 무죄 판결문을 들어 보이는 공우영 잠수사. 이진희 기자

“형님이 들어오세요. 여기 개판이에요. 질서도 없고 엉망이고, 해경(해양경찰)은 현장 통제도 안 되고요.” 4년 전 그날, 40년 경력의 베테랑 공우영(63) 잠수사가 후배로부터 다급히 전해 들은 세월호 구조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공씨가 한달음에 달려간 바다 한복판, 세월호가 빠져든 그곳은 무질서와 비탄의 공간이었다.

민간 잠수사들은 사람을 구하려고, 시신이라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기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2014년 눈물의 나날이 흐르고 정작 공씨를 비롯해 민간 잠수사들에게 돌아온 것은 고통과 망각이었다.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장비를 가져와 해군과 함께 세월호 희생자 시신 292구를 수습했던 민간 잠수사들은 동료 잠수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공씨의 허망한 4년을 지켜봤다. 공씨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뒤집어쓰고 기소됐다. 그의 억울함을 풀어내려고 민간 잠수사 25명은 수십만 원씩을 갹출해 변호사비를 마련하며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이들 중 2명이 잠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는 트라우마와 질병으로 생업을 놓았다. 산업재해 적용을 받지 못했고, 대다수가 정부의 보상에서도 제외됐다. 이들의 상처를 돌봐줄 법안은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지 4년이 지난 현재까지 국회에 묶여 있다. 이러한 상처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민간 잠수사들의 가슴을 찢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잊혀가고 있다. 지난 5일 세월호 구조 현장을 지켰던 민간 잠수사들의 맏형 격인 공우영 잠수사를 만나, 그들의 4년을 들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수색 작업 회의를 하는 민간 잠수사들. 가운데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는 이가 공우영 잠수사. 공우영씨 제공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수색 작업 회의를 하는 민간 잠수사들. 가운데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는 이가 공우영 잠수사. 공우영씨 제공

11명을 남겨두고 떠났던 바다

“세월호 유족들이 우리에게도 모임을 하나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그가 건넨 명함에는 ‘416민간잠수사회 회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다. 세월호 유족들에게는 늘 “은인이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공씨가 기억하는 2014년의 바다는 절망으로 검었다. 구하지 못한 생명들과 마저 수습하지 못한 이들을 뒤로한 채 쫓겨나다시피 돌아서야 했던 그 바다. 공씨는 4월 21일 구조현장에 합류해 퇴거 명령에 따라 7월 10일 바다를 나가기까지 태풍이 왔던 때 한 번 뭍으로 올랐을 뿐 빠짐없이 바지선을 지켰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떠나버린 잠수사도 7, 8명은 될 겁니다. 그토록 추운 바다 날씨에 해경은 난로도, 장비도 제대로 없고…, 우리는 ‘이 방법이 좋다, 저 방법이 좋다’는 식으로 수색 방법을 논의하고 경험을 알려주고 했어요. ”

민간 잠수사가 세월호 선체 내로 진입해 실종자 수색작업을 했고, 해경 잠수사는 세월호 밖에서 잠수사의 공기 공급선을 잡아주거나 실종자를 발견하면 수습을 도와주는 등 보조적인 역할만 했다. 공씨는 세월호에서 함께 일한 민간 잠수사 상당수를 잘 알고, 연장자로서 후배들이 따라 자연스럽게 관리 업무를 맡게 됐다. 1975년 해군에 입대, 이듬해 해군 해난구조대(SSU)에서 심해잠수사 교육을 받고 잠수사의 길을 걸어온 그는 수중개발업체 소속으로 천안함 함미 인양 작업에도 참여했었다. 잠수 현장에서는 경험의 역할은 크다. “후배 잠수사가 세월호 희생자 시신이 보이는데 창문이 안 깨진다고 한 적이 있어요. 선박 창문은 가운데를 깨면 안 되고 모서리를 쳐야 깨집니다. 이런 건 모두 경험해 봐야 아는 것들이죠.”

그렇게 3개월 가까운 기간, 292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공씨는 “해군과 민간 잠수사들이 수습한 시신들인데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3분의 2 정도는 민간 잠수사들이 해낸 것”이라고 회상했다.

11명의 실종자(현재 5명)를 남겨둔 7월 10일. 민간 잠수사들은 갑작스럽게 퇴거 통보를 받았다. 해경이 다른 잠수사들과 정식 업무계약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종자를 다 찾지 못해서 (작업 구간을 바꾸는) 교차 수색을 하려고 했는데 마무리를 못 한 상황이라서 무척 아쉬웠어요. 일방적인 해고라고 노동청에 신고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공씨는 추후 해경과 업무계약을 하고 고용된 민간 잠수사들은 애초 보수도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모였던 25명과 엄연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해경과의 유착비리 의혹을 받아 뭇매를 맞고 파산 지경에 이른 언딘에 대해서도 편견의 시선을 경계했다. “언딘이 그나마 바지선을 끌어오고 잠수 장비를 가져와서 제대로 수색을 할 수 있었어요.” 애초 참사 직후 공씨가 소속된 유성수중개발 대표가 언딘 측으로부터 “우리가 세월호를 인양하자, 해외 업체가 나서는 것보다 낫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가 현장에 간 것도 인양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많은 희생자가 수몰된 사실이 드러났고, 시신 수습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정부의 적반하장…기소와 무죄

정부는 그를 죄인으로 몰았다. 고 이광욱 잠수사가 현장에서 사망했는데,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공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2014년 8월 기소했다. 공씨가 민간 잠수사들을 관리ㆍ감독했다며 해경이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것이었다.

“검사가 별거 아니라고 하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기소됐다는 우편이 왔어요.” 충격을 받은 민간 잠수사들이 모였다. 20만~25만 원씩 돈을 모아 1심 변호사 비용(착수금 330만원+성공보수 330만원)을 마련했다. “해경이 잘못해놓고 왜 우리에게 그러는지”라는 성토가 이어졌지만, 세월호 유족들에게 누가 될까 봐 당시에는 언론에 알리지도 않았다. 다행히 2심부터는 공익 법무법인의 도움을 받아 변호사비가 100만원 가량으로 줄었다.

이 법정 싸움이 마무리된 것은 지난해 1월. 1ㆍ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무죄를 확정 받았다. 법원은 ‘실종자 수색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한 민간 잠수사들이 언딘 리베로호 바지선에 승선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권한은 중앙구조본부의 장에게 있었고, 대부분의 결정은 민ㆍ관ㆍ군 합동구조팀에서 협의를 통해서 결정되었다는 점’ 등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고 이광욱 잠수사의 현장 합류에 대해 공씨는 “더 충원이 없어도 된다”고 반대했으나 구조본부의 결정으로 이뤄졌다는 점도 지적됐다.

판결문에는 이광욱 잠수사의 사망 책임이 해경에 있다고 보이는 뉘앙스가 읽힌다. 공씨도 “판결이 해경이 잘못했다고 났다. 이광욱 잠수사 가족도 만나봤는데 그들도 해경 잘못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해경은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이 잠수사의 유족이 서울중앙지검에 해경 간부들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했으나 2015년 각하됐다. 공씨는 해경이 책임을 회피한 데 대해 “박근혜 정부에서 그렇게 진실을 밝히지 않으려 했는데 됐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공씨 사건의 1심을 맡았던 나양명 변호사는 “증거자료들이 범죄 혐의와 무관한 것들이 많았고, 검찰 증거는 큰 의미가 없어 재판하면서 사건(수사)을 사실상 다시 했다”라며 “수난구호법을 보면 재난이 발생했을 때 해양경찰청장이 지휘ㆍ감독하게 돼 있다”고 했다. 이소아 변호사(2심)는 “보통 과실치사는 형사담당 검사가 맡는데, 수사검사가 공안담당이어서 대검 쪽에서 지시가 내려간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지적이 맞다면 해경과 검찰이 민간인에 현장통제 관리 책임을 묻기 위해 사건을 몰아간 정황이 뚜렷하다. 검찰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른 것”이라며 “지청 배치표상 특정업무 전담검사로 지정돼 있어도, 지청의 특수성으로 인해 전담과 관계없이 통상의 경찰 송치형사사건을 배당해 처리한다”고 해명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 바지선에서 잠수를 준비 중인 한 민간 잠수사의 모습. 공우영씨 제공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 바지선에서 잠수를 준비 중인 한 민간 잠수사의 모습. 공우영씨 제공

내던져진 잠수사 25인의 삶

무죄 판결을 받은 공씨는 현재 경북 포항시에서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운이 좋은 경우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다 2016년 사망한 김관홍 잠수사, 그에 앞서 Y잠수사도 목숨을 잃었다. Y잠수사 사건은 유족의 반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월호 현장에 자발적으로 모였던 25명 중 23명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생존한 이들도 무리하게 수많은 잠수를 견디느라 상당수 골괴사(뼈세포나 조직이 죽는 질환) 등 후유증을 겪으며 생업을 포기해야 했다.

보상금을 지급받은 사람도 치료비와 생계비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016년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본부는 세월호 참사에 동원된 민간 잠수사 중 일부에게 1,000만~2억200만원을 지급했다. 1등급 보상금 대상은 2014년 5월 말 세월호 선체 수중절단 작업 중 폭발사고로 현장에서 숨진 고 이민섭 잠수사, 고 김관홍 잠수사였다. 그 외 대부분 7~9급 판정(1,000만~4,000만원 가량)을 받았다. 100회 이상 잠수하고 시신 20구 이상을 수습해 어깨 골괴사 판정을 받은 이들에 대한 보상은 산재 기준에도 턱없이 못 미쳤다.

또 전체 143명 잠수사 중 55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지만 27명(사망 2명 포함)만 인정돼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공씨는 “나도 쓰러져 입원한 적이 있는데, 나를 포함해 25인 중 3분의 2 정도가 받지를 못했다”며 “도대체 산정 기준이 무엇인지 달라고 해도 안 주더라”고 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쪽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 것”이라며 “애초 해경청장이 보상을 모두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작업 당시 정부는 민간 잠수사 1인당 하루 98만원, 공 잠수사에게는 관리 자격으로 130만원의 일당을 지급했다. 잠수사들의 요구가 아니었고 정부가 자체 책정해서 지급한 것이었다고 한다. 공 잠수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국제기준에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고 했다.

세월호 피해자를 민간인 잠수사 등까지 확대하고 의료비ㆍ심리치료 지원 등을 담을 일명 김관홍법(세월호 피해자지원 특별법 개정안)은 2016년 6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70명의 명의로 발의됐으나 국회 통과가 되지 않았다. 일부 조항을 과거 새누리당 의원들이 반대했고, 정부도 ‘일반원칙과 선례에 반한다’는 이유로 난색을 보였다. 정부가 최근 입장을 바꿔 지난 2월 27일에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를 통과했다. 공씨는 “자유한국당이 반대해서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했다. 불신은 뿌리 깊다.

포항=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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